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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나다>미국서 제2의 영화인생 신상옥.최은희씨 부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6면

원로 영화인 신상옥.최은희씨부부.사람들은 이들을 기억할때 78년 홍콩에서 북한으로 납치됐다 8년만에 탈출한 사건을 먼저 떠올린다.영화는 그 다음이다.꿈과 도피의 미학은 분단의 현실 앞에서 맥을 못춘다.86년 북한을 탈출하고도 한동안 이들은 북한체제를 가장 위에서,가장 가깝게 지켜본 증인으로 바쁘게 호명됐다.마치 이들의 위상이 영화인이 아니라 역사의 증인으로 새로 자리매김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태평양 건너 저편에서 제2의 영화인생을 꽃피우고 있다.탈출이후 미국에 정착한 이들은 88년 신프로덕션을 설립해 아시아인 제작자로는 유일하게 할리우드에 뿌리를 내렸다.91년 첫 작품인 어린이 영화 .세명의 닌자'는 2,3탄을 할리우드 자본으로 제작할 만큼 인기를 모았다.
신감독 자신도 칠순을 넘어선 나이에.마유미'.증발'등 두편을직접 연출할 정도의 의욕을 보이고 있다.
영화사들이 밀집한 LA 선셋대로에 위치한 사무실에서 이들 부부를 만났다.
신씨는“한창 일할 나이에 잡혀가 8년간을 공쳤다”는 북한체험에 대해서도 이제 옛얘기처럼 편안하게 말할 수 있게 된듯 했다. “주위에서 여러가지를 체험해 참 좋겠다고 그래요.김정일의 전폭적인 지원아래 마음대로 영화를 찍어봤으니 얼마나 행운이었느냐는 거지요.그러나 북한 영화는 한계가 있어요.한번은 선조들의간도 이주사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강간장면을 촬영하 는데 스태프가 다 도망가버렸어요.나중에 큰일 날 것이 분명하니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나중에 김일성이 이 장면을 보고.우리조상들이 저렇게 고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게 중요하다'고 칭찬으로 끝났지만 말입니다.” 신씨는“그래도 북한체험은 사회성을 갖고 영화를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었다”고 한다.그는 북한에서 부인 최씨가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소금'을 비롯,모두 7편(뮤지컬 두편 포함)의 영화를 연출했다.
“이들 영화는 모두 이념을 선전하는 영화여서 한 측면밖에 모르는 절름발이”였다.그래도 그는 여기서 자신의 결핍을 보았다.
우연한 체험에 의한 영화감독으로서의 개안(開眼).그는 어느때보다 의욕에 차있다.올해는 한국에 나와 샤머니즘을 소재로 한 영화를 한편 찍을 계획이다.
그리고 연말이나 내년초께 20년전부터 구상해왔던.칭기즈칸'의제작에 착수할 작정이다.
“칭기즈칸은 중국.몽골등에서 영화화한 적이 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어요.서구에서는 파괴적인 정복자로만 그려졌고요.제가 그리고 싶은 것은 당시의 사회상과 어울리는 인간상입니다.초원에서살게 되면 남에게 빼앗아온 어머니를 모셔야 되고, 또 아내를 빼앗기기도 합니다.그래서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갖고 제국을 건설하고 나니 끝없이 이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해야하고,이것이 칭기즈칸의 인생입니다.” 신씨는 몇년전 할리우드 자본으로 이 영화를 만들어볼까 했지만 포기했다..물주'가 인기있는 백인배우캐스팅을 요구했기 때문이다.전부 동양인을 캐스팅하고 싶었던 그는 계획을 보류했다.자신이 직접 돈을 모아 제작자로 나설 작정으로. 신씨는.칭기즈칸'이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한다.그래서 여기에 부인 최씨를 꼭 칭기즈칸의 어머니로 캐스팅하고 싶어한다.
교포들의 연극무대에서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최씨는“그동안 몇군데서 캐스팅 교섭이 있었는데 응하지 않았다”면서“그러나.칭기즈칸'을 하게 되면 정말 야생마 같은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한다. 신씨가 또하나 숙제처럼 생각하는 일은 한국영화사를 쓰는것이다. “나운규 영화부터 최근의 영화까지 고스란히 봐온 사람중에 나 외에는 살아있는 사람이 없어 책임을 느낀다”는 신씨는최근 본 한국영화중 인상적인 영화로는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던.런어웨이'를 수작으로 꼽았다.
“뚝심과 배짱도 있어 보이고,웬만한 미국영화보다 더 낫다.뒤에 숨어.예술합네'하고 무게잡지 않아서 좋다”는게 그 이유다.
평생 한국영화의 현장에 있었던 신씨의 한국영화사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LA=남재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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