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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정신보건법 시행元年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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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세기 우리나라 정신보건사의 획기적인 사실을 든다면 그 하나는 정신보건법 제정일 것이다.이것을 위해서 신경정신의학회는 여러해 전에 그 초안을 만들고 정부에 건의해 왔으며,드디어 법이 제정됐고,시행규칙까지 마련해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정신보건서비스 원칙은.돈이 덜 들면서도 양질의,인간적인 정신의료를 지역공동체 중심으로 실시한다'는데 있다.현재 우리나라의 정신보건법은 지역사회 정신의료의 철학이 부족하고 정신보건에 대한 국가의 재정적 지원 폭이 매우 좁다는 흠이 있어 장차 수정 보완돼야 할 것이다.그러나 정신병환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환자의 사회복귀를 위한 재활(再活)을 적극 권장하는 등 좋은 내용을 담고 있다.
문제는 이 법을 어떻게 운용하느냐다.지금까지의 입법심의과정을지켜볼 때 문제되는 점이 많이 눈에 띈다.무엇보다도 정신의료에간여하는 소위.이해당사자 집단'이 눈에 보이는.이익과 손해'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정신보건법을 왜 제정했는 지 그 근본정신과 목적을 잊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 큰 문제는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면서도 우리나라 정신보건의비전을 제시하고 정신보건법의 기본정신에 입각해 정신의료를 개혁해 나갈 수 있는 정신보건전문가로 구성된 정신보건정책개발기구가정부에 없다는 사실이다.
미국에는 국립정신위생연구소,일본에는 국립정신위생연구소와 도쿄(東京)도립(都立)정신의학총합연구소가 정신보건정책 개발의 핵심자료를 제공하고 있다.일본 후생성 정신보건과는 우리나라 보건복지부 국(局)의 규모인데다 그 전문지식과 사명감이 놀랄만하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정신보건을 전담하는 과(課)는 고사하고 모처럼 마련한 정신보건담당관제도 잦은 인사이동으로 그 실효성을상실하고 있다.이렇게 정신보건정책의 기본철학을 구체화할.설계사'가 없는 형편이고 보니, 해당되는 법과 규정의 심의결과는 원칙없는 이해당사자간 적당한 타협으로 끝나고, 정신의료의 향상발전이 아니라 하향평준화를 합법화시켜 오히려 정신의료수준을 일반의료수준보다도 낮게 할 위험의 소지마저 있다.
정신보건법은 한마디로 국민을 위한 법이요,환자를 위한 법이다.전문가집단을 위한 법이 아니다.어떻게 하면 정신장애환자에게 인간적이며 양질의 의료를 베풀 수 있으며,국민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서 만들어지고 그런 이념 아래 운용돼야 할 법이다.
오늘날 우리는 환자를 멀리 떨어진 대형병원.대형요양원에 평생수용하기보다 지역내 작은 병원에, 그것도 될수록 개방병동에서 사회적 기능을 살려가며 치료하고,장기입원보다 낮 또는 밤병원 등 반(半)입원제도를 이용해 일찍 퇴원시키는 한 편 각종 정신적.사회적 재활을 거쳐 사회로 복귀시키는 것이 환자를 위해 가장 바람직한 의료임을 알고 있다.
정신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정신장애의 조기치료와 예방을위한 각종 정신건강교육과 계몽이 정신보건센터를 중심해 국가의 지원으로 이뤄져야 하며,정신보건전문가뿐 아니라 각종 정신보건요원.지역주민 등 사회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이 총동원돼 환자를위해,지역공동체의 정신건강 증진을 위해 각자의 기능을 살려 협동하는 것이 진료의 필수조건이다.
이러한 조건을 조금이라도 충족하기 위해선 현재의 정신의료의 질과 내용을 총체적으로 재검토해 그 목적과 기능에 따라 보다 다양하게 정의하고 이에 따르는 인력수급이나 시설기준을 각기 다르게 마련해야 한다..전공의는 전문의 1의 0.5 로 간주한다'는 식의 산술적(算術的).획일주의적 규정으론 정신의료발전을 기하기 어렵다.
새해부터 시행된 이 법의 운용을 검토하는 과정을 보다 확실하고 일관되게 하려면 무엇보다 정신보건정책발전을 위한 항구적.전문적 연구기구의 설치가 꼭 필요하다.
李符永 〈서울대교수.정신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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