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옴부즈맨칼럼>3金의 新年휘호 배경설명 부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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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휘호(揮毫)란 붓을 휘두른다는 뜻인데 미상불 쓰는 사람의 마음자리가 드러나게 마련이다.더군다나 지도자라는 사람들의 신년휘호를 보면 그들의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세상만사 마음먹은대로 된다고도 하고,또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올해 3김(金)의 휘호를 보면 그들의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법하다.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의 휘호는.유시유종(有始有終)'이다.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뜻이다.임기가 끝나는 대통령이 스스로.
유시유종'을 썼다는 것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하겠다.그런데 이것을 풀이한 각 신문의 해설을 보면 천편일률 로 똑같다.
물론 똑 같다고 해서 나쁘달 것은 없지만.주어진 자료'와.주어진 풀이'의 한계에서 머무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유시유종'은 金대통령의 의중(意中)도 의중이려니와 그 말의출처인 원전(原典)에서 어떻게 쓰여졌는지도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가령 한(漢)나라때 양웅(揚雄)이 편찬한.법언(法言)'에서 인용한.유시자 필유종 자연지도야(有始 者 必有終 自然之道也-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자연의 도리다)'라는 말만 하더라도.유시자 필유종(有始者 必有終)'의 앞에.유생자 필유사(有生者 必有死)'라는 말이 쓰여 있다..유생자필유사'는 곧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는 뜻이다.따라서 이 말의 전체적인 뜻은.사람은 반드시 죽고 시작은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자연의 도'라는 이야기다.여기에서의.유시유종'에는 어떤.의지'따위가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는 것이다.
이른바 도(道)의 경지란 그런 것이다.유시유종과 대칭되는 말로는.무시무종(無始無終-비롯도 없고 끝도 없다)'이 있는데 결국은.유시유종'이나.무시무종'이나 도의 차원에서는 같은 뜻이 돼버리고 만다.
또하나.유시유종'의 신문풀이를 보면.논어(論語)'에서.유시유졸 기유성인호(有始有卒 其惟聖人乎-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성인만이 할 수 있다)'라는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것 역시성인(聖人)의 경지,곧 도의 경지를 일깨워주는 것에 다름아니다.물론 소인(小人)은.유시무종(有始無終-시작을 하고 끝맺지 못함)'을 상징하기 때문에 유종(有終)하는 성인의 경지가 부러운것이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유종'하는 경지를 일컬어.유종지 미(有終之美)'라고도 하거니와그 아름다움의 참뜻은 힘을 자연스럽게 빼는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의 세계에서 어떻게.유종지미'를 장식하느냐 하는 점에서 김영삼대통령의 신년휘호를 풀이하는데는 어쩔 수 없이 도(道) 아닌 세속(世俗)적 경지에서의 의미심장(意味深長)을 찾을 수밖에 없을 터이다.
김대중(金大中)씨의 신년휘호는.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해서 진실을 추구한다)'라고 한다.김대중씨는 신년의 국민회의 단배식에서도 정권교체의 결의를 다지면서.실사구시 김대중(實事求是 金大中)'이라고 서명까지 했다고 한다.그런데 중앙일보는 이점에 대해 별로 비중을 두지 않고 소홀히 넘기고 말았다.그러나김대중씨가.실사구시'를 표방한 의지를 그렇게 경시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실사구시'라는 말은.후한서(後漢書)'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서 나온 말이다.이 말은 지금도 중국에서 대단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상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鄧小平)이 모두.실사구시'를 내걸고 권력을 장악한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마오쩌둥은 옌안(延安)에서의 권력투쟁에서 교조주의자를 배척하면서.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를 주장했을 때 자신의 사상적 근거로 .실사구시'를 내세운 바 있다.또한 덩샤오핑은 그의 재복권(再復權)과 더불어 이.실사구시'의 기치를 내걸고 마오사상(毛思想)의 주박(呪縛)에서 사상을 해방시켜 오늘날의 개방화된 중국을 이끌었던 것이다. 물론.실사구시'란 말은 우리에게도 생소한 말만은 아니다.조선조말에 실학파(實學派)의 학문적 입장이나 태도를 일컬어.실사구시'라 했고,특히 김정희(金正喜) 같은 이는.실사구시설'이란 글에서 널리 배우고 힘써 행하되,오로지 실사구시 한마디말을 주로 하여 실천하면 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새해 첫머리에 김대중씨가.실사구시'를 쓴 의중은 물론 학문적이 아닌 정치적인 것일 터인데 그것에 대한.실사구시'가 신문의과제로 떠오르고 있는 셈이다.
김종필(金鍾泌)씨의 신년휘호.줄탁동기(啄同機)'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해에 언급한 바 있거니와 여기서 한마디 사족을 붙인다면 줄()과 탁(啄)이라는 글자풀이다.은 알속의 새끼가 부화해알껍질을 깨고 나오려 안간힘쓰면서 알껍질을 쪼는 순간의 모습을말해주는 글자다.啄은 바로 그 순간 어미새가 밖에서 알을 쪼아깨는 모습을 뜻하는 글자다.이.줄'과.탁'이 동시에 이루어지지않으면 새로운 생명은 태어날 수 없고 죽어버리게 된다.대선(大選)의 해에.줄'과.탁'은 그 야말로 여운의 묘(妙)를 남기고있는 셈이다.
이규행<본사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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