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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이 삼촌의 꽃따라기] 울릉장구채 … 철 지난 꽃도 예쁘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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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 보니 오징어가 널린 바닷가다. 아, 내가 어제 이곳 묵호항에 와서 잤지. 콧물이 흐르고 몸살까지 겹친 듯하다. 묵호의 하늘은 폐병 환자의 얼굴처럼 허옇다. 나만큼이나 컨디션이 좋지않아 보인다. 애마 혼자 주차장에 떼어놓고 가기가 미안하다. 얼마나 있다 올 거냐며 주차장 관리원이 묻는다. “저녁 배로 나올 거예요.” “아이고, 왜∼에?” “꽃 사진만 얼른 찍고 나오면 되거든요.” “아, 그럼 5000원입니다.”

9시 배인데도 승선객이 예상보다 많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런데 저 풍경은 뭔가? 아침부터 어이하여 술이 들어갈까? 이따가 다 도로 내놓으면 어쩌려고…. 안내방송이 선내에 울린다. “파고가 높고 울릉도·독도에 강풍주의보가 내려 있으니 준비한 멀미약이 있는 분은 미리 사용하기 바랍니다.” 어젯밤에 오면서 먹은 맥반석 계란이 은근히 걱정이다.

며칠 전에는 아주 낯익은 예쁜 여자가 꿈에 나타났다. 잠에서 깨어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 머릿속을 뒤적이다 피식 웃고 말았다. 그녀는 모 방송국 기상캐스터였던 것. 날씨 방송을 하도 보니까 꿈에 다 나타난다.

오늘은 날씨 나쁘다는 소리는 없던 것 같은데 출항 5분쯤 지나니 정말로 배가 울렁거린다. 그래, 내가 또 ‘울렁도’를 가고 있구나. 아직까지 한번도 멀미를 해본 적이 없는지라 나는 스스로를 믿어본다. 창밖으로 수평선이 급격하게 기울어진다. 배가 현기증 나는 높이에서 떨어진다. 눈을 붙이고 있는데 도착 예정 시간이 30분 늦어진다는 안내방송이 나온다. 당일치기 일정이 위태롭다.

배는 낮 12시40분 울릉도 도동항 옆구리에 들어간다. 뜻밖에도 항구는 담요로 둘러싼 듯 포근하다. 나가는 배 시간에 맞춰야 하기에 밥이고 뭐고 나중으로 미루고 일단 해안가 좌측 산책로를 누빈다. 울릉도의 가을 풍경은 듣던 대로다. 바다를 넣지 않고 찍은 사진이면 설악산이라고 우겨도 되겠다.

그런데 이건 뭐람? 장구채 종류로 보이는 식물이 해안가에 너저분하게 씨를 맺고 있다. 울릉장구채가 이렇게 흔한 걸까. 너무 쉽게 만나니 영 싱겁다. 어쨌거나 이리 널려 있어도 울릉도에서나 볼 수 있으니 결코 흔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선명한 울릉장구채의 꽃이 하나둘 레이더에 잡힌다. 목표로 삼은 털머위는 잊은 채 울릉장구채의 하얀 꽃에 포커스를 맞춘다. 이왕 찍을 거면 반쯤 목숨 거는 것도 괜찮다. 벼랑으로 기어올라가 중심을 잡고 앉아 파란 바다를 배경에 놓아본다. 시간을 내지 못해 9월 내내 안달했던 꽃이다.

울릉도엔 철 지난 꽃들이 간혹 핀다. 섬기린초라든가 땅채송화, 갯까치수염, 왕호장근, 섬현삼 같은 꽃이 그렇다. 꽃을 보니 몸이 아파도, 배가 고파도, 잠을 못 자도 즐겁다.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서둘러 돌아간 여객터미널이 파장 분위기다. 매표구가 모두 흰 종이로 막혔다. 기상 여건이 좋지 않아 묵호항으로 가는 5시30분 배는 취소되고 없다는 안내문이 나붙었다. 꼼짝없이 1박을 하게 생겼다. 재수가 안 좋으면 1주일을 묶이기도 한다는 섬, 그러나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게 내 신조 아닌가. 걱정하실 부모님을 위해 집에다 전화를 넣는다. “강풍주의보가 내려 묵호로 가는 배가 없대요. 내일 들어갈게요.” 배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뜨지 못했다. 닷새 지나 묵호로 나오니 애마의 유리창이 먼지로 뽀얗다.

글·사진 이동혁 http://blog.naver.com/freebow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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