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승리한 다음 날 이탈리아 이민자인 나는 미국 시민권을 신청했다.”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이 9일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 설치된 8m 길이의 대형 벽보를 바라보고 있다.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대통령 당선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이 벽보 위에는 “변화는 쉽지 않지만 하나의 세계로서 함께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서 킹 목사가 1963년 8월 28일 인종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나에겐 꿈이 있다(I have a dream)”고 연설한 장소인 링컨기념관 계단 앞에는 이런 글들이 쓰인 대형 게시판이 세워져 있다. 세계에서 340만 명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는 인터넷 환경·인권단체 아바즈(AVAAZ.org)가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 후보가 당선된 다음 날인 5일(현지시간) 오후에 세운 것이다. 동쪽으로 높이 솟은 오벨리스크 형식의 워싱턴 기념탑을 등지고 서 있는 이 게시판은 요즘 하루 수만 명이 찾는 관광 명물이 됐다. 9일 오후 이곳을 찾은 흑인 여성 밀드레드 펄린(58)은 게시판 작은 기둥에 “내 생애에 흑인 대통령이 나올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오바마, 당신은 나의 자랑”이라고 썼다. 보행이 불편해 보이는 그는 “나는 관광객이 아니라 워싱턴DC에 살기 때문에 이곳을 잘 찾지 않는다. 그러나 오바마 게시판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내가 느낀 감격을 표현하기 위해 왔다”고 말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왔다는 대학생 조시 윌리엄스(23)는 “흑인 초선 상원의원인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뽑은 미국은 인종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오바마는 아메리칸 드림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했다”고 말했다. 뉴저지에 산다는 세라 트랩(34)은 “초등학생 두 딸에게 새 역사가 이뤄졌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 플로리다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왔다”며 “우리의 이런 마음이 오바마에게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관광객들은 벽보에 자신의 사진을 붙인 뒤 당선축하 메시지를 곁들이기도 했다.
아바즈는 인파가 쇄도하자 게시판을 추가로 여럿 세웠다. 5~9일 글을 남긴 사람은 10만여 명에 달한다. 아바즈는 “오바마가 직접 게시판을 봤으면 좋겠다”는 뜻을 민주당에 전달했다. 게시판은 12일 철거된다. 아바즈는 그걸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전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오바마가 게시판을 본다면 미국과 세계 시민의 염원이 얼마나 크고, 강렬한지 실감할 것이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