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5.18관련자 검찰진술 요지-5.18 관련부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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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3일 공개된.12.12및 5.18사건 관련자 진술내용'책자는 전직대통령 2명에 대한 당사자.참고인등의 진술을 담고 있어관심거리다..서울지검 12.12및 5.18 특별수사본부'명의로발간된 책자는 12.12부분이 1백97쪽,5. 18부분이 3백12쪽으로 방대하며 피의자.참고인등 모두 2백15명의 사안별 진술내용이 기술돼 있다.그동안 재판과정등에서 공개되지 않았던 참고인등의 주요 진술내용을 간추려 본다.
[편집자 註] ◇전두환(全斗煥)씨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권정달(權正達)씨는“가장 큰 이유는 중정의 풍부한 예산을 전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또 신현확(申鉉碻)전총리는 全씨가 80년초 총리실로 찾아와 겸직의사를 밝히자“국가의 중요정보를 한 사람이 독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반대의사를 밝혔고 崔대통령도“민간인 출신을중정부장에 임명해 중정기능을 원상회복하고 보안사 의 정보독점을지양하는게 국정운영에 바람직하다”는 의사표시를 申전총리에게 했다고 진술했다.
◇신당 창당=80년 6월부터 全씨 지시로 시작됐다.권정달씨에따르면 실세중의 실세였던 허화평(許和平)씨가 81년 1월 權씨에게 이상재(李相宰)씨를 민정당 조직국장으로 쓰라고 해 그대로임명했는데 곧바로“당 사무차장으로 중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를 두고 權씨는“許씨등이 李씨를 사무차장에 임명토록 한 것은 비(非)하나회원인 자신(사무총장)을 견제하며 당을 장악할 속셈이었던 것”이라고 밝혔다.
權씨는“허화평씨의 직책은 대통령비서실장 보좌관이었지만 사실상비서실장이었으며 김경원(金瓊元)비서실장은.얼굴마담'이었다”고 진술했다.許씨는 청와대 입성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 시절에도“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도 許씨가 부르면 와야 하는 실정이었다”는게 權씨 진술이다.許씨는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의 비자금을 관리하는등 사실상 2인자 역할을 했으나 그 과정에서 이순자씨와의 마찰로 쫓겨난 것이라고 했다.
◇언론청문회 위증무마=權씨는 허문도(許文道).이상재씨가 90년 7월 언론청문회에서 위증한 혐의로 검찰조사를 받게 되자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정구영(鄭求永)씨의 부탁으로 부득이 자신이 허위진술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鄭수석은 검찰수사가 시작되자 자신에게 전화를 걸어“허문도씨등은 언론사 통폐합과 관련이 없다”는 취지의 진술을 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는 것이다.
◇비상국무회의 김옥길(金玉吉)문교 강제참석=김경일 당시 수경사 통신과장은 김옥길 문교장관이 참석연락을 받고“몸도 아픈데다기사가 퇴근하고 없어 못나오겠다”고 했다고 진술.이에 주영복(周永福)국방장관이 연락담당 공무원에게 강압적인 태도로“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야 한다.콜택시라도 타고 나오라고 전달하라”는 말을 했다는 것.
비상각의에서 주영복장관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안건임을 밝히자金문교는“이게 뭐예요.이래도 되는 거예요”라고 항의했으나 일사천리로 토론없이 8분만에 가결됐다.
◇국무회의장 봉쇄및 강압분위기=김기병 당시 총무처 통신주사보는 비상각의 다음날인 80년 5월18일 출근해 보니 중앙청으로들어오는 2천4백회선 전부와 구내선 모두가 니퍼로 절단돼 있어복구하는데 30일 걸렸다고 진술했다.
한편 성환옥 당시 수경사 헌병단장은 周국방장관이 17일 오후10시쯤 중앙청으로 들어오면서 자신에게“여보,내가 올라오는데도무서워 다리가 떨리던데 병력을 너무 많이 배치한게 아니야”라고말해 일부 국무회의장 배치 병력을 철수시켰다고 진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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