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지도>32.한국의 작곡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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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위촉.공모같은 주문식 생산이 아니면 수요가 거의 없다시피 한창작음악에 종사하는 한국의 작곡가들….생계비에서 작곡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10%에도 못미친다.음악계의.초대받지 않은 손님'같은 찬 대접을 받는 이들의 대부분은 대학을 마 지막 보루로 삼고 있는게 현실.기업이나 오케스트라등이 상주작곡가 제도를 도입해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활로를 뚫어야 할 때다.
난 88년 서울올림픽 팡파르를 작곡,전세계인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던 김정길(61.서울대 음대)교수는 내년 홍난파 탄생 1백주년을 앞두고 정트리오가 위촉한 .난파 가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2개를 작곡중이다.작품료는 4백만원.최근작으로 는 KBS교향악단의 서울대 개교50주년 기념 관악캠퍼스 공연때 축전서곡을 작곡한 것이 전부다.그리고 가끔씩 기업의 사가(社歌)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1편에 1천만~2천만원 받는 영화음악도92년.명자 아끼꼬 쏘냐'를 끝으로 손 을 뗀 셈이다(김교수는81년.만다라'를 시작으로 모두 8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미래의 오피니언 리더들인 공무원.신입사원 연수때 클래식 음악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는 것도 우리 음악계의 장래를 위해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 강연요청이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는다.
김교수의 올 연봉은 4천2백만원.여기에 강연.원고료 수입과 작품료가 각각 1천만원 정도다.총수입에서 작품료가 차지하는 비율이 18%정도에 불과하다.실용음악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몸소실천하고 있는 김교수의 경우가 이 정도니 다른 작곡가들은 더 열악한 수준일게 뻔하다.
한국에는 전업작곡가가 없다.대부분 다른 직업을 갖고 생활비를딴데서 번다.작곡료가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0%도 안된다.지휘자겸 작곡가였던 구스타프 말러도 자신을 가리켜.휴일작곡가'라고 말했다.
작곡과는 음악대학 학과중 졸업후 진출 경로가 가장 다양하고 넓다.바꿔 말하면 작곡가라는 직업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것이다.엄밀히 말해 한국에서.작곡가'라는 직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교수나 평론가.지휘자.연주가.방송인.매니저.음악행정 .영화음악등에 종사한다.
졸업후 작곡가로 활동하기에 가장 좋은 여건은 역시 대학이다.
작곡가의 마지막 도피처,최후의 보루,유일한 희망이다.작곡가에게이 시대 마지막 후견인은 정부도 기업도 아닌 대학이다.
작곡가들의 높은 대학 의존도는 심각한 정도를 넘어섰다.대학은작곡가들에게 생활의 안정과 창작의 자유를 가져다 주었지만 청중이 없다는 이유로 상아탑에 안주하는 부작용도 낳았다.작품발표를주로 연구실적용으로 생각하는 풍토 때문에 작가 의식은커녕 청중과의 소통에 별 관심이 없는 상황으로 떨어지고 있다.
작곡발표회라는 이벤트는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작품은 찾기힘들다.작품을 발표해봐야 평론을 통한 피드백도 없고 작품에 대한 평가도 교수로서의 자신의 위치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늘의 별따기처럼 얻기 힘든 교수직의 문턱에서 진입하지 못하고 있는 젊은 작곡가들 대다수가 입시생 레슨으로 생활비를 버느라 바쁘다.그나마 몇푼 안되지만 작품료라고 해서 받는 것은행복한 케이스다.
대관료와 연주료를 물면서 자기 돈 들여 애써 작품발표회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국에는.작곡을 하지 않는 작곡가들'이 너무 많다.졸업생들은과잉배출된다.작곡가의 천국이라는 독일보다 작곡가의 숫자는 더 많다. 한국작곡가협회(회장 김용진)에는 창악회(회장 최승준).
미래악회(회장 백병동).아시아작곡가연맹 한국지부(회장 이영자).여성작곡가협회(회장 서경선).제3세대(대표 이건용).전자음악협회(회장 황성호).21세기악회(회장 권순호).작곡신세 대(대표 이병욱).소리목(대표 이강율).작악회(회장 황철익)등 많은단체가 있다.1명이 3~4개 단체의 회원으로 중복 가입된 경우도 있다.
대부분 새로운 음악양식이나 창작의 노선보다는 인맥과 학연(學緣)으로 모인 이들 단체는 매년 1~2회의 발표회에 필요한 대관료.연주료를 문예진흥기금(3백만원)에 의존한다.
작품의 질을 떠나 공연실적이 없으면 다음해 지원금이 중단되기때문에 연례행사처럼 작곡발표회를 갖는다.
물론 청중은 동료나 제자들로 채워진다.문예진흥기금의 창작활성화 기금은 기준의 일관성이 없어 창악회처럼 40년 역사에 1백명이 넘는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단체나 5년 경력의 동인(同人)수준이나 지원액수는 같다.3백만원으로는 작곡료는 고사하고 대관료.연주료를 제외하면 어림도 없다.1백만원짜리 광고협찬도 못받게 되면 작곡가들이 호주머니를 털어야 한다.
그나마 문예진흥기금은 작곡가들이 손 내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창구다.지난해 광복50주년을 맞아 각 연주단체에서 기념 칸타타를 위촉,초연한 것을 제외하면 굵직한 행사에서는 창작이 소외됐다는 여론이 높다.
중국 작곡가 류진구의 오페라.안중근'에 문체부가 16억원의 제작비를 들였고,막대한 예산을 투자해 잠실벌에서 펼쳐진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향연'등은 생산을 외면하고 소비 위주로 흐르는 문화정책의 산물이며 창작음악의 현주소다.창 작품의 초연은 고사하더라도 기왕에 발표된 작품이 재연(再演)될 수 있는 풍토가 아쉽다.명곡이란 하루 아침에 탄생되는 것이 아니다.연주가 거듭되면서 수정을 거치고 다듬어져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작곡을 수록한 악보집을 모아 놓을 자료센터 하나 변변치 않은 것도 문제다.최근 국내 음악시장이 커지면서 외국 연주자들이내한공연이나 국내용 음반 제작과정에서 한국 작곡가의 작품을 포함시키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고 있다.
정부나 민간기업에서도 일회성 음악 이벤트에 쏟아붓는 예산의 10%만 창작곡에 투자한다면 국내 음악계의 모습은 훨씬 달라질것이다.한국작곡가협회 김용진 회장은 .음악진흥재단'을 만들어 창작곡에 대해 집중 지원할 계획이라지만 돈을 낼 사람이 없다.
기업의 문화재단에서도 창작음악 이야기만 나오면 고개를 흔든다.홍보효과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래도 작곡가들은 반쯤 포기한 상태에서 침묵으로 일관한다.그래서 더 무시를 당하니 작곡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작곡가라는 직업이 점점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가는 이유는 무엇일까.해답은 간단하다.영화음악.방송음악.경음악등 실용음악 작곡가를 제외하면 작품에 사회적.경제적 효용가치가 없기 때문이다.아르투르 오네게르의 말처럼 작곡가는.초대받지 않 은 잔치에 끼어들려고 끈질기게 시도하는 일종의 침입자'며 존 케이지의 고백처럼 .작곡은 마치 생면부지의 낯선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신세대 작곡학도들은 현실감각에 매우 뛰어나다.이들의 대부분은선배들처럼 메아리없는 외로운 창작의 길을 걷기보다 차라리 영화음악.방송음악.광고음악에 진출해 전업작곡가로 성공하기를 원한다.학내 분위기상 드러내놓고 자신의 미래상을 밝히 지는 못하지만새로운 커리큘럼으로 각광받고 있는 컴퓨터음악 시간이 기다려진다.최근 가요계에 표절이 난무하는 것도 작곡가들이 제대로 공부를안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작곡과 출신들이 모두 실용음악에만 매달리는 것도 문제다.
따라서 작곡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럽의경우처럼 전업작곡가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보장제도나 미국처럼 상주작곡가 또는 전임작곡가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
상주작곡가란 어떤 도시나 대학.기업.병원이 1~2년동안 한 작곡가의 생계비 전액을 부담하는 대신 지역사회의 일원으로 거주하면서 작품을 쓰고 발표하는 제도다.뉴욕필등 각 오케스트라가 상주작곡가를 두는 것은 보편화돼 있다.
□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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