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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돌파구는 문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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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 독일 프랑크푸르트에는 기아자동차의 유럽디자인센터가 있다. 그곳 책임자는 아우디와 폴크스바겐의 오랜 디자인 총괄자였던 피터 슈라이어 부사장이다.

그의 책상 위에 사진이 한 장 놓여 있었다. 올해 55세의 슈라이어가 7세 때 동생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그들은 오래된 BMW 자동차 앞에서 자연스레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슈라이어는 말했다. “한국에서 자동차는 산업이지만 독일에서 자동차는 문화”라고. 자신의 자동차 디자인은 그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이었다.

 # 독일 자동차는 기술과 디자인 모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들이 벤츠·BMW·아우디·폴크스바겐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자동차 산업을 이끌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그 바탕엔 산업 이전에 문화가 있었다. 그것이 그들의 숨은 저력이고 진짜 경쟁력이다.

# 독일의 루르 탄전지대에 위치한 에센의 졸페라인 탄광은 코킹 플랜트 시설을 갖춘 거대한 복합 탄좌였다. 하지만 지금은 뮤지엄과 아트센터로 탈바꿈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중의 하나가 됐다. 탄좌가 문을 닫은 지는 꽤 됐지만 여전히 석탄 냄새가 진동하는 졸페라인 뮤지엄을 보면서 다시금 절감하는 것은 모든 문화와 예술은 삶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독일인들은 문화나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어 보이던 탄광의 삶터를 자신들의 문화와 예술을 드러내는 뮤지엄으로 재탄생시켜 돈으로 다 셀 수 없는 가치를 창출한 셈이다.

# 독일 뒤셀도르프에는 디자인을 바탕에 둔 물건들만 파는 중고 시장이 있다. 하지만 싸구려 시장이 아니다. 100유로 이상 되는 물건이 수두룩하고 천장에 걸린 모빌은 3000유로나 했다. 우리 돈으로 500만원이 훌쩍 넘는다. 물론 다 중고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비쌀까? 디자인을 바탕으로 한 상품은 오래될수록 값이 떨어지기는커녕 되레 천정부지로 뛰기 때문이다. 특히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상품들은 거의 현대의 골동품 수준이다.

하지만 실제 거래도 아주 활발하다. 우리에게 디자인은 여전히 낯선 그 무엇이지만 그들에게 디자인은 생활이고 일상이다. 이 중고 시장 자체가 생활 속에 디자인이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요, 생생한 현대예술의 갤러리다. 더불어 디자인이 내수를 살린다. 우리처럼 경제가 조금만 위축돼도 내수가 꽁꽁 얼어붙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얼어붙은 경제를 녹이려면 문화와 예술, 그리고 디자인이 필수다.

# 요동치고 있는 세계경제는 ‘보이는 경제’에서 ‘보이지 않는 경제’로 바뀌고 있다. 보이는 경제란 돈으로 셀 수 있는 것의 경제다. 보이지 않는 경제란 지금 당장 돈으로 셀 수 없는 것의 경제다. 굳이 말하자면 ‘카운터블 경제(countable economy)’에서 ‘언카운터블 경제(uncountable economy)’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카운터블 경제’의 핵심에는 금융이 있고, ‘언카운터블’ 경제의 핵심은 문화·예술, 그리고 디자인이다.

 # 이젠 문화가 돈이고 예술이 첨단이며 디자인이 가치다. 새로운 성장동력은 기왕의 산업분야에 있지 않다. 세계적으로 문화·예술·디자인이 신성장동력의 주축이요, 핵심이다. 이런 변화의 큰 흐름을 주목해야 한다.

금융 중심의 ‘카운터블 경제’가 문화·예술·디자인 중심의 ‘언카운터블’ 경제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음을 이 소용돌이 속에서 봐야 한다. 나라도 기업도 개인도 눈앞의 위기 극복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무엇을 가지고 먹고살며 어떻게 미래를 돌파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 해답이 문화·예술·디자인에 있다. 거기에 미래로의 돌파구가 있다.

정진홍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