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함께 잘 사는 공간을 위하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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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호 04면

곤충과 식물이 공생관계임을 모티브로 삼은 무주 곤충박물관. 관람객은 반딧불이 생태공원 안에 지어진 박물관에서 지하와 지상과 하늘로의 긴 여행을 떠난다.

얘기는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기용씨는 무주를 운명처럼 만났다. 뜻 맞는 지인들과 ‘이행기의 문화운동’ 준비모임으로 국토여행을 하다가 무주에서 안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성재에서 안성벌판을 내려다본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서는 체험을 했다. ‘아니 한국 땅에 변치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풍경이 아직 남아 있다니’. 정씨는 그곳에서 이런 땅의 소리를 들었다.

-정기용 무주 프로젝트 10년

‘나 안성면이 한반도에 남은 마지막 땅인데 너 잘 만났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나를 좀 잘 지켜다오’. 땅과 교감하는 건축가의 본능이 10년에 걸쳐 ‘무주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된 출발점이다.

『감응의 건축-정기용의 무주 프로젝트』(현실문화 펴냄)는 그 보고서이자 만남의 기록이다. 건축가는 무주에서 사람과 통했고, 시대와 교감했다. 김세웅 당시 무주 군수는 “서울의 큰 집만 짓던 분이 어떻게 이 작은 마을에 와서 마을회관에 손을 대게 되었습니까?”라고 물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주민자치센터보다 목욕탕이 더 좋아
“시골에서 목욕 한번 제대로 하려면 연례행사나 마찬가지잖아요. 이곳은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안성면처럼 무주읍에서 가까운 곳도 버스를 타고 30분 가야 목욕탕에 갈 수 있으니, 따듯한 물에 몸 한번 담그는 게 참 번거로웠죠.” 이 한마디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면사무소(주민자치센터)에 목욕탕 시설을 넣은 계기가 되었다. ‘정기용표 공공목욕탕’은 전국 다른 지방자치단체로 퍼져나갔다. 이 사례가 바로 ‘감응의 건축’이다.

무주 공설운동장이 등나무 운동장으로 변신한 것도 한 어르신의 말씀 덕이었다. 군내 행사 때마다 초대한 주민들이 거의 오지 않고 공무원만 덜렁한 이유를 군수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여보게 군수, 우리가 미쳤나. 군수만 본부석에서 비와 햇볕을 피해 앉아 있고 우린 땡볕에 서 있으라고 하는 게 대체 무슨 경우인가. 우리가 무슨 벌 받을 일 있나? 우린 안 가네.” 정기용씨는 등나무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등나무들아, 네가 너희한테 집을 지어 주마. 그러면 너희는 근사한 그늘을 만들어다오.” 이렇게 해서 무주 등나무 운동장이 탄생했고 서서히 무주 주민의 사랑을 받는 장소로 변해 갔다. 식물의 축복을 받은 공설운동장은 집회시설이자 야외영화관이며 특별한 쉼터가 됐다.

세상을 천천히 조금씩 바꾸는 건축
정기용씨는 이렇게 지은 집 한 채 한 채에 깃든 추억을 더듬는다. 안성면 주민자치센터 등 주민자치센터 네 곳, 무주군청과 뒷마당 리노베이션, 무주시장 현대화, 청소년 수련관과 문화의 집, 곤충박물관과 자연학교, 향토박물관, 천문과학관, 버스정류장, 농민의 집, 된장공장, 노인전문요양원, 무주 추모의 집을 그는 자식 이름 부르듯 하나씩 되씹는다.

“내가 무주에 낳은 자식이 수십 명인데 어느 것 하나 무심히 넘겨 버릴 자식이 있겠는가” 묻는다. 그러면서 안타까워한다. 이제 지은 지 겨우 몇 년을 넘겼을 뿐인데 벌써 왜곡과 변형으로 일그러진 집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낳는 일보다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듯이 건물 역시 짓는 일보다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이 더 빛나는 것이다. 5년만 넘으면 낡은 건물 취급하고, 10년 넘어가면 언제 철거해서 신축할 것인가 고민하는 요즘 세태는 자원과 예산 낭비일 뿐이다. 게다가 건축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시간과 기억을 잃어버리는 게 더 무섭다. 사람들 삶이 묻어 있는 건축물이어서다. 그 흔적을 어찌 복원할 것인가.

정기용씨는 인문사회학·인간학으로서의 건축을 강조한다. 사람과 관계 맺으며 인간사 소통에 이바지하는 집을 짓고 싶어 한다. 무주 프로젝트가 그러했듯 “건축이 세상을 다 바꿀 수는 없지만 천천히 바꾸는 데는 한몫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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