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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프라를세우자>8.정부기록보존소 살리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5면

지난 여름 한.일관계를 연구하는 이승억(한양대 대학원)씨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지난 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의 회의록 일부가 헌책방에서 고가에 매매되고 있었던 것이다.정부기관의소장여부가 불투명한데다 소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자료였다.
이씨의 경험은 정부의 중요 문서가 정부차원에서 관리되지 않고개인적인 통로를 통해 거래되고 있는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
최근 정보공개법 제정을 둘러싸고 정부와 국회에서는 정보공개 제외 대상의 범위를 두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그러나 우리의 경우 정보공개문제보다도 그 전제가 될 자료의 보존과 기록관리 체계의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실제로 지난달 발생한 .안두희피살 사건'을 계기로 정부기관의공문서 보존과 관리체계가 얼마나 허술한지 다시 한번 확인됐다.
안두희 관련자료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49년의 재판기록은 전쟁으로 소실됐다고 하더라도 4.19시기 에 있은 안두희에 대한 검찰의 수사기록조차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은 이해하기어렵다.40년도 채 안된 공문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역사자료를 담당하는 전문적 기관으로는 총무처 산하 정부기록보존소,교육부 산하 국사편찬위원회,외무부산하 외교안보연구원,독립기념관 산하 독립운동사연구소등 다양하다.그러나 각 기관간 유기적인 협력체계가 마련되지 않아 서로간 에 어떤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정부의 공문서를 효율적으로 보존.관리하기 위해 69년 8월 총무처 산하에 설치된 정부기록보존소의 보관문서와 운영실태를 보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정부수립 이후 생산된 공문서는 당연히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수집.보존해야 한다.그러나 정부기록보존소에는 중요 국가정책,역사적사건에 관한 기록물이 제대로 수집돼 있지 않다.정부발간 간행물도 70년대 이후 생산된 것이 대부분이고 그것마 저도 체계적으로 보존돼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정부수립 이후 생산된 수많은 정부문서들은 다 어디로갔는가. 놀랍게도 상당수의 공식문서와 관련자료들이 소각되거나 훼손됐다고 한다.현재 정부기록보존소는 중앙 정부의 중요문서와 각 지방자치단체의 영구보존 문서를 이관받아 보관한다.그러나 영구보존 대상이 아닌 문서,즉 보존기한이 지난 문서는 모두 소각된다.사료적인 가치가 있는 문서도 보존기한이 지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무런 고려없이 불길 속에 던져지는 것이다.
또 우리의 현대사가 파행적으로 전개되면서 집권자들이 자신에게불리한 자료들을 아예 폐기하거나 개인적으로 보관하는 경우도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실례로 이승만 전대통령의 문서들은 이화장(梨花莊)에 대부분 소장돼 있고,박정희 전대통 령의 문서들은가족들이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다.당연히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돼야 할 최고통치자를 비롯한 고위급 자료들은 거의 보관돼 있지않다. 상황이 이런데도 정부기록보존소가 제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은 정부문서 이관을 위한 강제규정이 없기 때문이다.현재 정부기록보존소에 문서를 이관하고 있는 기관은 중앙행정부처및 지방행정기관등 76개 기관이다.그러나 정부기록보존소의 역할은 직접 문서를 분석.분류해 이관받는 것이 아니라 각 부처에서 넘겨준 문서를 목록과 수량만 확인한 후 보관하는데 그치고 있다.따라서각 부처에서 독자적으로 문서를 폐기처분하고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하지 않을 경우에도 이것을 막을 제도적 장치가 없다.그 결과대통령이나 정부기관의 고위관료들이 직무수행기간에 생산된 모든 문서를 퇴임시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개인이 소유하는 것으로 관례화돼 있다.
문서의 분류와 보존을 담당할 전문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다.현재 각 기관의 이관문서는 일반 행정직 또는 기능직원이 담당하고 있으며 정부기록보존소의 수집업무도 전문성이 약한수집계 직원이 담당한다.따라서 이관될 문서의 보 존시한(.영구'.준영구'.10년 이하'등 )에 대한 분류작업이 비전문가에 의해 형식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정창현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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