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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아틀라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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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유능한 기업인들이 하나둘씩 어느날 갑자기 아무런 흔적없이 사라진다. 대학교수.의사.예술가 등 전문가 집단이 그 뒤를 따른다. 기업인과 전문가들의 일종의 파업이다. 그들은 외부 세계와 단절된 계곡에 자신들만의 신세계인 '아틀란티스'를 건설한다. 아틀란티스에서는 개인의 창의성과 자발성이 보장된다. 그들을 파업으로 내몬 것은 '이성(理性)'을 억누르고 '감성'을 강요하는 사회다. 항상 주위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사회 정의'라는 기치를 내건 공동체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다.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생산성을 높여 시장을 장악한 기업인은 착취자로 몰렸다. 성과에 관계없이 종업원이 넉넉하게 먹고 살 수 있도록 임금을 올려야 했다. 약자에게는 강자로부터 도움을 요구할 권리가 주어졌다. '이성'을 강조하는 철학자나 예술가는 설 자리가 없었다.

유능한 기업인과 전문가들이 떠난 사회는 엉망진창이 된다. 권력에 빌붙어 손쉽게 돈벌려는 사이비 기업인과 불쌍한 대중만 남았다. 주위에 잘난 사람이 없었기에 '배 아파하는'사람은 없게 됐지만, 어디 한 구석 제대로 굴러가는 곳이 없다. 철도 운행이 중단되는 바람에 식량조차 쉽게 구할 수 없게 된다. 미국의 철학자며 소설가인 에인 랜드가 1957년에 펴낸 고전 '아틀라스'(민음사)의 줄거리다. 아틀라스는 2002년 미국 의회도서관의 설문조사에서 성경에 이어 두번째로 미국인의 인생에 큰 영향력을 끼친 책으로 꼽혔다.

에인 랜드는 "난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해 살거나 다른 사람더러 나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하지 않겠다"고 강조한다.

이른바 합리적 개인주의 또는 객관주의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목적일 뿐이라는 얘기다. 인간이 이성에 입각해 지식을 구하고 생존과 번영을 추구할 때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경제를 통제하고 부(富)를 재분배해야 한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우리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푸줏간이나 빵집 주인의 박애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돈벌이에 관한 관심 덕분이다"는 애덤 스미스의 말이 연상된다.

요즘 부쩍 한국에서 기업 하기 힘들다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반(反)기업 정서가 커지고 있다는 우려도 많다. 아틀라스의 상황이 소설 속의 얘기로만 여겨지지 않는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