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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현안에 침묵하는 '朋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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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자민련은 13일 정부의 노동법 개정 추진과 관련한 대변인 성명을 내고 『노조의 정치활동.복수노조및 제3자 개입 허용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성명은 『경제난국이 최악인 현상태에서 국제경쟁력을 한층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노동법을 반드시 개정해야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보수 본류를 자임해온 정당으로서 진보적 방향의 법 개정이 국가경제와 노사관계에 미치는 악영향을 우려한 흔적이 역력했다.
더구나 정부.여당은 물론 같은 야당인 국민회의도 아직 구체적의견을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소신이기에 방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 주변에서는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지난달 경총.중소기협중앙회.노총 간부들과 잇따라 회동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JP가 드디어 총대를 멘 것 아니냐』는 술렁거림도 있었다.그러나 성명서가 기자실에 배포된지 얼마 안돼 당무회의에 참석 중이던 안택수(安澤秀) 대변인이 기자실로 달려왔다.
그는 『성명이 취소됐으니 기사화하지 말아달라』고 통사정했다.
대변인실 여직원들도 성명서를 일일이 회수하느라 기자들과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문제의 성명서는 마치 당의 1급비밀같이 취급됐다. 이날 소동은 노동법 개정에 대한 입장표명을 둘러싼 당내이견 때문에 빚어졌다.
성명 발표사실을 뒤늦게 안 국회 노동환경위원장 이긍규(李肯珪.서천)의원이 『정부의 개정안이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먼저 나서 덤터기를 쓸 이유가 없다』며 입장표명의 보류를 강력히 건의했고 金총재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이날의 성명 발표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일부에서는 『모처럼 당의 소신을 알려 보수세력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기회를 잃고 말았다』고 아쉬워했지만 『민감한 사안을 건드려 하마터면 여론의 십자포 화를 맞을 뻔했다』는 안도의 목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솔직하게 정견을 표시해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시류에 영합해 임기응변식으로 처신해야만 표를 지킬 수 있다고 믿는 현실적 계산이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한 의원은 『정당의 침묵은 부당하고 비겁한 일』이라며『도대체 정당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이 무엇을 기준으로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보수든 진보든 스스로의 이념적 지향을 어느때 고 당당하게 표방할 수 없다면 편협한 이해관계로 뭉친 붕당(朋黨)과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이 의원은 아쉬워했다.
이하경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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