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북카페] “주부들의 속마음은 …” 오정희 우화소설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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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돼지꿈
오정희 지음, 랜덤하우스, 228쪽, 1만원

 “다이아 반지를 갖고 싶다는 욕망이 천만 없으면서도, 행여 남편이 사온다 해도 그 길로 되물릴 것이 분명한데도 나이 들어가면서 어른 노릇을 해야 할 처지에 결혼식에만 갔다 오면 한바탕 남모를 속병으로 편찮아지고 심술을 부리고 싶어지는 심사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결혼반지’에서)

그런 순간이 있다. 속으론 ‘이게 아닌데’하면서 튀어나오는 말도, 흘러내리는 눈물도, 과장된 몸짓도 제어되지 않는 순간 말이다. 겉으론 드러나지 않지만 속으론 높이 파도쳤다 이내 잠잠해지는 내면의 모습을 예리하게 잡아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등단 40주년을 맞은 소설가 오정희의 우화소설집이다. 사보 등의 매체에 짬짬이 발표해온 짧은 이야기 25편을 모았다. 대개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온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박애주의로 넘실대는 한 부부가 아이를 그만 낳고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막상 입양한 아이가 매일 밤 울어 젖히는 통에 불면에 시달리던 여자는 어느덧 매질까지 해대는 자신을 발견한다. 날 밝으면 아이를 고아원에 돌려보내리라 결심하고 색동저고리와 꽃 고무신을 안겨줬던 그날 밤, 아이는 울지 않는다. 한밤중 몰래 일어나 꽃 고무신을 신는 아이에게서 여자는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색동저고리’). 진정한 모성이 샘솟는 순간이다.

오랜만에 친정나들이를 떠나려는 순간 남편이 결혼식에 입고 갈 바지를 다려놓고 가라는 주문을 던지는 바람에 기차를 놓치고(‘아들이 좋은 것은’), 남편에게 과거의 애인 이야기를 순진하게 털어놓는 바람에 별거에 들어가는(‘은점이’) 등 답답한 여자들의 인생살이도 담겼다. 그러나 남편의 양복 주머니에 들어있는 제주행 비행기 티켓 두 장을 보곤 결혼생활 20년간 몇 차례 지나갔던 ‘바람’을 생각하며 손끝을 덜덜 떠는 아내 이야기(‘가을여행’), 함께 손수 도배를 하다 친구 전화에 나가는 남편을 보곤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해 아이들 손을 잡고 친정에 가는 여자 이야기(‘부부’) 등엔 소박한 반전이 있다.

당당히 휴가를 요구하는 요즘 드라마 속의 엄마와 비교하자면 자못 뒤처진, 가부장적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시간차를 두고 발표했던 작품들이라 세상의 변화가 작품마다 조금씩 달리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엄마나 아내로 한참을 살아온 여성들이라면 “맞아, 맞아”하며 고개 끄덕일 이야기들이다. 쳇바퀴 도는 주부의 일상에 질렸다며 남편 앞에서 하소연하다가도 비가 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빨래를 걷으러 뛰어가는 모습(‘아내의 30대’)은 바로 여자들의 일상다반사 아닌가.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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