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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불꽃처럼 살다 간 급진주의자의 초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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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엠마 골드만
캔데이스 포크 지음, 이혜선 옮김
한얼미디어, 688쪽, 2만8000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급진주의 물결의 한 복판에 그가 있었다.

아나키스트이자 페미니스트인 엠마 골드만(1869~1940) . 그녀는 러시아 제국의 카우나스(현재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나 16세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가난과 노동을 피하려 결혼도 했지만 불화를 겪고 이혼했다. 그를 급진혁명가로 만든 것은 1886년 5월 시카고에서 벌어진 헤이마켓 사건이다.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하며 파업을 벌이던 노동자를 진압하던 과정에서 경찰 7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시위에 가담한 아나키스트 8명에게 살인 혐의를 씌웠고 사법당국은 이들 가운데 4명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 사건은 미국은 물론 전세계의 급진주의 운동에 불을 지폈다. 당시 파업이 시작됐던 5월1일은 국제노동자의 날이 됐다.

급진운동에 뛰어든 골드만은 자유연애와 언론자유를 부르짖었으며 산아제한운동을 강력히 옹호했다. 경찰과 언론은 그를 ‘미치광이’‘빨갱이들의 여왕’이라고 불렸다. 옹호자들은 그를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반란 여성’으로 숭배했다.

그러나 엠마의 내면은 이념과 감정 사이에서 갈등을 거듭했다. 자유 연애를 주장했지만 속으로는 ‘바람둥이’ 연인 벤 리트먼의 배신에 절망하고 괴로워했다.

“네. 나는 여자예요. 틀림없는 여자이지요. 그것이 내 비극입니다. 여성인 나와, 결연한 혁명가인 나 사이에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 있어서 나는 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누가 스스로 행복하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운동가의 면모보다 신념과 감성 사이에서 고민했던 한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췄다. 그가 정치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나눈 편지, 특히 ‘호보 킹(일명 뜨내기 일꾼들의 아버지)’이라 불린 시카고의 사회운동가이자 부인과 의사였던 벤 리트먼과 주고받은 연애편지가 주된 자료다.

리트먼을 알게 된 것은 아나키스트 활동을 다룬 신문 기사에서였다. 의사이면서도 성매매 여성, 뜨내기 일꾼을 비롯한 낙오자들의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벤이 사람들에게 떠밀리는 바람에 시위 주동자로 몰렸다는 사실은 몰랐다. 골드만은 리트먼과의 첫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벤의 갈색 눈은 크고 순진해 보였다. 웃을 때면 도톰하고 육감적인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벤은 잘 생긴 짐승 같았다.”

엠마는 미국에서 순회 연설을 계속 하다 미국의 1차 대전 징병제 반대 운동을 공모한 죄로 1년 6개월간 수감생활을 한다.

1919년 추방 명령을 받은 뒤 러시아 혁명박물관 건립을 위한 조사 팀에서 일했지만 볼셰비키의 탄압에 반발해 스웨덴 망명 길에 올랐고 이후 독일·영국·프랑스 등 유럽을 떠돌았다. 마지막 행선지는 캐나다였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뒤 난민들을 돕기 위해 연설을 계속 했고 캐나다에서 망명 중이던 이탈리아 아나키스트 아르투르 보르톨로티가 구속되자 구명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40년 5월 14일, 토론토에서 뇌졸중으로 눈을 감았다.

키가 작고 약간 뚱뚱하며 말쑥한 파란 눈을 가졌던 골드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번민하고 갈등했을지언정 세상을 뜨는 날까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일하고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보살폈다.

그가 더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지은이는 캘리포니아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다 골드만과 리트먼이 주고 받았던 편지 뭉치를 발견한 뒤 골드만의 삶을 연구하게 됐다. 이 책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 급진주의 물결 가운데서 치열하게 살았던 한 여성의 삶이다.

김진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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