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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이젠 남북 관계를 개선할 차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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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북·미 간 핵 협상은 오랜 교착 끝에 한걸음 앞으로 나가는데 남북관계는 지난봄부터 후퇴를 거듭한다. 북한의 노동신문은 이명박 정부를 역적도당이라 부르면서 남북 관계를 전면 중단할 수도 있다고 압박한다. 사태가 왜 여기까지 왔는가. 남북한이 함께 원인을 제공했다. 이명박 정부가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처럼 핵보다는 민족의 입장에서 뜨거운 가슴으로 북한을 상대하라는 북한의 파토스와 지난 10년 같이 대화를 위한 대화, 국내정치를 염두에 둔 대화는 하지 않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차가운 로고스가 충돌한 것이다.

북한은 특히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명한 2007년 10·4 합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 청사진대로라면 남한은 북한의 경제·사회 개발에 10조원 넘는 지원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이 합의에 두 가지 이의를 달았다. 하나는 대북 지원은 북한의 핵 포기를 전제로 하거나 적어도 병행해 제공한다는 것이고, 둘은 10·4 합의가 한국의 입장에서 경제적 타당성과 재정 부담 능력 검토, 국민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 정당한 입장이다.

대선 두 달 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대못질을 하는 심사로 약속하고 도장 찍은 것을 수정과 조건 없이 지킬 수는 없다. 다만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부터 입 가진 자 모두 한마디씩 한다는 식으로 자극적인 대북 발언을 쏟아낸 것이 사태를 악화시켰다.

그뿐 아니다. 북한이 올 초 이명박 당선자 측에 특사 접촉을 비공식으로 제안한 것을 이 당선자 측이 거부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걸 특정 신문에 슬쩍 흘린 것은 큰 실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표하는 김영남 최고인민대표회의 상임위원장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문제가 논의되는 도중에 새 정부 요직에 발탁될 것으로 거론되던 사람이 불쑥 밖으로 발설해서 논의의 싹을 잘라버린 것이 또 하나의 실수였다. 합참의장의 선제 공격 발언과 통일부 장관의 핵 해결 없이는 개성공단 확대 없다는 발언이 따랐다. 북한이 ‘뿔’나기에 충분했다.

북한은 4월 초부터 남한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김정일 위원장의 와병설과 관련된 정보를 청와대가 나서서 논평 또는 확인한 것은 불 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이런 와중에 이 대통령이 러시아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했으니 노동신문이 남한은 속에 칼을 품고 대화요, 진정성이요 하는 입에 꿀 발린 소리를 한다고 공격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2000년의 6·15 선언은 남북 화해와 협력의 비전 제시고, 2007년의 10·4 합의는 그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다. 북한이 10·4 합의에 더 무게를 두는 데는 현실적 이유가 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12년을 ‘강성대국의 대문을 여는 해’로 설정했다. 사상과 군사 부문의 강성대국의 조건은 끝났다고 판단한 북한은 경제 부문에 올인할 참이다. 그러자면 10·4 합의 프로젝트들의 실천이 절실한데 그런 기대와 계산에 찬물을 끼얹은 게 정부의 대북 지원 4원칙이다.

남과 북은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남북 관계를 핵 협상의 진전에 맞출 것인가. 북한이 착각부터 버려야 한다. 어떤 살벌한 말로 압박해도 이명박 시대가 김대중·노무현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북한은 촛불시위 같은 것에 기대를 거는 것 같은데 그건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받은 531만 표 차의 의미를 간과하는 단견이다. 남한은 청와대와 정부가 노동당이 말하는 ‘최고 존엄’을 포함한 북한 문제에서 말을 아끼고 선택할 줄 알아야 한다. 김정일의 와병설에 대해 왜 미국 정부같이 신중하고 자제하지 못하는가.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한 것은 국정감사에서 일부 의원이 주장한 것처럼 우리 안보를 희생하는 게 아니다. 핵 협상에 관한 한 그건 큰 진전이다. 국회의원들은 미국이 본의 아니게 북한을 비핵화시키는 노선에서 홀로 이탈하는 게 아니냐고 추궁했어야 한다. 부시 정부 관리들은 북핵 절대 불용(不容)을 단언한다. 그러나 그들이 북한의 입장까지 대변할 수는 없다. 유명환 외교부 장관의 말대로 우리가 미국을 야단칠 입장은 아니지만 진전의 베일 속에 미국도 의도하지 않은 함정이 없는지 경계해야 한다. 동시에 핵 협상의 진전에 맞춰 남북 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해야 한다. 6·15 선언과 10·4 합의를 수용한 이 대통령의 국회 개원 연설은 실용적인 재출발선이 될 수 있다.

김영희 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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