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자칼럼>진실겉도는 역사적 재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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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요즘 서울고등법원 형사법정에서는 매주 2~3차례씩 12.12,5.18사건 항소심이 열리고 있다.
전직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고,기소됐던 피고인 대부분에게 유죄가 인정된 1심에 이은 이 재판은 사실상 이 사건과 관련된 사실심리로는 마지막 재판인 셈이다.
1심재판에서 진실이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은 것같다며 불만을보였던 많은 국민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를 걸어보는 재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번 재판을 지켜보면서 「진실은 겉돌고,책임회피만난무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신군부 장성출신으로 한때 대단한 권세를 누렸던 피고인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이 나오면 서로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그런가 하면 일부 증인들은 진실에 접근하는 민감한 사안에 오면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로 회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지난 월요일에는 5.18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李熺性)피고인이 5.18당시 발포근거로 제시됐던 「자위권 보유 천명」담화문은 합수부에서 작성돼 부하 황영시(黃永時)피고인에 의해전달받은 것이라는 진술을 했다.
1심 때 이 담화문 작성 경위등이 대충 얼버무려졌던데 비하면대단한 고백이라 신선한 느낌도 받았다.그러나 黃피고인이 「그런일 없다」고 딱 잡아떼고 있어 이 역시 오리무중이다.
당시 상황에 대한 중요한 사실들을 증언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최규하(崔圭夏)전대통령은 1심에 이어 이번에도 증언하지 않겠다고 밝혔다.『전직대통령이 재임중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소명이나 증언해야 한다면 앞으로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명분도 변함없다.
전직 대통령이 앞으로의 국가경영을 걱정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과거 왜곡된 역사로 인해 국민들 사이에 깊어진 불신과 의혹,그 때문에 상처받은 국민심성에 대한 책임감은 별로 느끼지않는 것같아 실망스럽다.
상처받은 국민심성은 진실이 시원히 밝혀지고 책임있는 사람들이과거를 참회함으로써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어야 치유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재판이 중요한 것은 그 기록이 바로 우리 자식들에게 남겨줄 「역사」의 사초(史草)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崔전대통령이 후손을 위한 「진실의 기록」에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낀다면지금까지 주장해온 명분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항소심 재판장인 권성(權誠)부장판사는 재판 도중 뭔가 숨기는듯한 증인들에게 『정직만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이 재판에 관련된 모두가 이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새겨들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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