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는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게 아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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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호 34면

절대 신임을 표현하는 고사성어로 계포일낙(季布一諾)이라는 말이 있다. 옛날 초나라에 계포(季布)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젊었을 때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한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그는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가 천하를 걸고 싸울 때 항우의 장수로 출전했던 사람이지만, 항우가 패전하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여 그의 목에 천금의 현상금이 걸리게 됐어도 그를 아는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그를 고발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금 백 냥을 얻는 것이 계포의 승낙 한 번 받는 것보다 못하다[得黃金百斤 不如得季布一諾]”며 그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한다.

요사이 황금 몇 냥을 챙기기 위해 시장을 떠도는 사람들이 가장 목말라 하는 덕목이 바로 신뢰인 것 같다. 어찌 된 영문인지 우리 정부가 “괜찮다”고만 하면 시장은 정반대로 움직인다. 정부가 환율 상승이 비정상적이라고 했더니 환율은 더 치솟고, 주가도 조만간 안정될 것이라고 했더니 기다렸다는 듯이 폭락하고 말았다. 새 정부가 시작된 지 지금까지 하는 일마다 신뢰감을 주기는커녕 실망감만 안겨줘 이제는 국민도 시장도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하면 “원래 콩으로 메주를 쑤는 게 아닌가 보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콩이 아니라 팥으로 메주를 쑤는 건가 보다”라고 생각할 지경에 이른 듯싶다.

정부를 신뢰하지 못하기는 미국과 유럽의 시장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미국 정부가 엄청난 금융위기 대책을 내놓았고 다른 선진국들이 모두 합세했건만 세계 주식시장의 반응은 이른바 ‘블랙 먼데이’ 수준으로 싸늘하다. 세계 금융시장의 허브로 확실하게 입지를 다진 듯싶었던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도 은행 지급의 전액을 국가가 보증하거나 은행 국유화 정책을 실시하는 등 국가 부도 직전까지 내몰리고 있다. 프랑스·독일·영국 등도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구제금융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번 잃은 신뢰를 회복하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신뢰란 본래 선물처럼 거저 받아 챙기는 게 아니다. 철저하게 자신이 한 행동의 보답으로 얻는 것이다. 단 한 번의 멋진 행위로 순식간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대체로 오랜 세월 차곡차곡 얻어 쌓아가야 하는 속성을 지닌 게 바로 신뢰다. 게다가 정말 허무한 것은 아무리 오래 쌓은 신뢰도 단 한 번의 실수나 잔꾀로 인해 완전히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신뢰는 얻기도 힘들지만 지키기도 힘들고 일단 잃고 난 다음 회복하기란 차라리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어렵다. 우리 정부가 조만간 추락한 신뢰를 회복해 시장을 이끌어주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은 이미 다른 신뢰의 대상을 찾고 있는 듯 보인다. 이 시점에서 나는 우리 사회도 이제 제대로 된 두뇌집단(think tank)을 가질 때가 됐다고 본다. 미국의 저력은 누가 뭐라 해도 엄청나게 다양한 두뇌집단들로부터 나온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지식경제 체제의 후발주자들은 자체적으로 변변한 두뇌집단을 갖고 있지 못한 관계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의 두뇌집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문제는 미국의 두뇌집단들이 내리는 결론과 처방이 언제나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 역시 자국의 이익이라는 굴레에서 자유롭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지난 몇 달 사이에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건이 있었음을 상기시키고 싶다. 세계 유가가 150달러에 육박하던 지난 3월 초 골드먼 삭스를 비롯한 미국의 거대 두뇌집단들이 한결같이 머지않아 200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예측할 때 우리나라의 삼성경제연구소는 우리가 주로 수입하는 두바이유의 가격이 금년 하반기에는 76.08달러로 내려갈 것이라는 ‘용감한’ 예측을 내놓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예측이었음을 안다. 미국의 두뇌집단들이 자신들의 국가는 물론 자기 기업의 이득을 감안한 예측을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삼성경제연구소 역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분석하여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최근 내년 세계 유가를 94달러, 그리고 환율은 1040원으로 예측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또 한번 지켜볼 일이다. 우리의 두뇌집단들이 꾸준히 신뢰를 쌓아 우리 사회의 계포가 될 날이 그리 머지않았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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