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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24. 세계태권도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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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73년 5월 25일 국기원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태권도 세계화의 첫걸음을 내디딘 역사적인 날이었다.

1972년 11월 30일, 서울 역삼동 산 76번지에 대한태권도협회 중앙도장인 국기원이 개관했다. 오일쇼크를 딛고 꼭 1년 만에 완공됐다. 드디어 국기원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개관식에는 김종필 총리와 김택수 체육회장, 양택식 서울시장, 송요찬 전 내각수반, 독일 대사 등 많은 손님이 참석했다. 그러나 화려한 개관식이 아니라 엉성한 개관식이었다. 여전히 강남은 벌판이었다. 도로도 가운데만 아스팔트가 깔렸고, 나머지는 모두 비포장이었다. 전화· 전기·수도도 없었다. 밤새 국기원까지 전기를 끌어들였고, 청와대 전화 2대를 빌렸다. 물은 산 밑의 우물을 펌프로 길어 올려 탱크에 받아놓고 썼다. 무척 추울 때였는데 히터가 없어 두세 개 방에만 가정용 난방기를 달고, 큰 방에서 리셉션을 해야 했다.

중앙도장을 지은 다음 태권도 사범들의 소망은 세계대회 개최였다. 세계대회는 세계화의 첫발이다. 그 전에 월남(현 베트남) 수련단이 왔을 때 월남대사관에서 최홍희 국제태권도연맹(ITF) 총재를 만난 적이 있다. 최 총재는 ITF에 대한태권도협회를 가입시키라고 권했다. 태권도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세계연맹이 필요한데 그때 ITF는 세계연맹이 아니었다. 국제연맹은 각국 협회가 회원이 돼야 한다. 그런데 ITF는 그런 국제기구가 아니고 최 총재가 정일권 당시 총리에게 부탁해 친선단체로 등록한 기구였다. ITF와 대한태권도협회의 통합 논의가 있었고, 우선 ITF가 만든 형 4개를 받아들였는데 그 이후 진전은 없었다.

73년 5월 25일부터 27일까지 사흘간 국기원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세계연맹도 없는 데다 국고 보조도 안 받고, 각국 협회가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다. 세계에 나가 있는 사범들이 전부 자비를 들여 제자들을 데리고 참가했다.

경기는 3분 3회전이었다. 헤드기어는 없었고, 대나무로 만든 몸통 호구만 입고 뛰었다. 그러다 보니 부상 위험이 있어 국제경기로서는 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그 후 84년 LA 올림픽 때 서울올림픽조직위 부위원장으로서 참관했을 때 복싱 선수들이 헤드기어를 쓴 것을 보고 귀국 즉시 태권도에 헤드기어를 도입했다. 처음에는 복싱 선수용 헤드기어를 쓰다가 나중에 우리 것을 개발했다.

제1회 세계대회에는 미국에서 세 팀(동·중·서), 독일에서 두 팀(베를린·독일)이 참가했고, 한국·프랑스·자유중국(현 대만)·우간다·아이보리 코스트·일본(교포팀)·멕시코 등 모두 20개 팀이 참가했다. 한국이 종주국으로서의 체면을 세우며 우승했다. 이때 한국대표인 이기형 선수는 뛰어난 기술로 세계를 놀라게 했다. 내가 주례까지 섰는데 나중에 페루에서 활약하다가 갱들의 저격을 받고 사망했다.

세계대회가 끝난 다음날인 28일, 국기원에 20개국 대표가 모여 세계태권도연맹(WTF)을 창설했다. 규약을 만들고 초대 총재에 김운용, 사무총장에 이종우를 선출했다. 비록 임의단체였지만 세계화의 첫발을 내디딘 역사적인 날이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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