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찾게 해주는 ‘빛의 마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터렐의 초기작 ‘론도, 블루’(1969)가 설치된 방. 연작의 하나로 막다른 벽 앞에 가벽을 세운 뒤 그 뒤에서 파란 빛을 쏘아 방 전체에 퍼지게 했다. [토탈미술관 제공]


“우리는 왜 안으로 들어가는가. 바깥을 바라보기 위해서다.”

제임스 터렐(65·사진)은 서울 홍지동 산자락에 있는 쉼박물관 뜰에 컨테이너 박스를 세웠다. 천장이 뚫린 이 집에 들어가 고개들어 하늘보기. 그의 작품 ‘스카이스페이스(Skyspace)’ 감상법이다. 해는 저물고, 하늘은 시시각각 변하며, 들리는 소리는 풀벌레 울음뿐. 신과 대면한다면 이럴까. 어두워가는 하늘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자연의 섭리에 경외감을 품게 된다.

‘빛의 마술사’로 불리는 제임스 터렐이 한국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쉼박물관, 평창동 토탈미술관, 청담동 오룸갤러리 세 곳에서다.

터렐은 쉼박물관에서는 하늘을, 다른 곳에서는 빛과 어둠을 품었다. 어둠이 있어 빛이 더욱 귀하다. 캄캄한 전시장서 더듬더듬 자리를 잡고 어둠에 눈을 익히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저편에서 사각의 희미한 빛이 떠오른다. 토탈미술관의 ‘비즈비 그린(Bisbee Green)’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예술가로서 자아를 강조하지 않는다. 겸허하게 빛과 하늘을 품었다. 보는 이도 어둠 속을 더듬고, 해질 때를 기다리고, 오랜 시간을 들여야 그의 작품을 통해 자아와 만날 수 있다. 그는 “변하는 것은 당신을 둘러싼 세계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당신 자신이라고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터렐은 퀘이커 교도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의 빛을 지니고 있으며, 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명작을 보여주는 미술사 수업 중 작품이 아니라 빈 스크린에 비친 빛에 감동해 미술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람들은 사물을 비출 때 빛을 사용하지만 나는 빛의 실체와 빛을 어떻게 보는지를 생각한다.”

1960년대 후반 어두운 공간의 벽 모서리에 빛을 비춰 기하학적 형상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79년엔 미국 애리조나 사막의 사화산인 로덴 분화구를 샀다. 지름 3.2㎞에 달하는 이 분화구에 터렐은 빛과 천체현상을 볼 수 있도록 수많은 방과 터널을 만들고 있다. 30년째 진행중인 이 프로젝트는 2011년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같은 해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서 회고전을 연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일본 나오시마(直島)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그는 61년 겨울을 서울에서 보냈다. 라오스서 의료봉사요원으로 복무하다 중상을 입고 서울로 후송됐다. 기무사령부 옆 국군병원에서 넉 달 가량 입원했다. 부인은 한국인이다. 터렐은 “관람객들이 작품을 통해 ‘내면의 빛’을 체험하길 바란다”며 “한국 사람들은 무아지경 개념을 알고 있으니 잘 적응할 것”이라고 기대감을 비췄다.

이번 서울 전시엔 30여 점이 나왔다. 초기 홀로그램 작업부터 로덴 분화구 모형까지 선보인다. 전시는 12월 18일까지다. 토탈미술관 02-379-3994, 쉼박물관 02-396-9277(야간은 예약제), 오룸갤러리 02-518-6861.

권근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