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칼럼>궁금증 더하는 인수봉 初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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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서울시민이 매일 대하는 북한산 인수봉(8백3)은 한국 근대등반의 요람이다.인수봉은 아기를 업은 모습과 같다 해서 부아악(負兒嶽)이라 불렸다.
이곳을 처음으로 오른 사람은 누구일까.이에 대한 가장 오래된기록은 삼국사기(1145년)에 나타나 있다.백제를 세운 고구려동명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기원전 18년 10명의 신하를 이끌고 도읍지를 정하기 위해 부아악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그러나 부아악은 북한산이 아닌 경기도용인 부악산(4백4)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2천여년 전에 그 험준한 인수봉을 어떻게 올랐을까 하는 의문도 제기된다.결국 건국설화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다만 인수봉이 지금보다 오르기 쉬웠으리라는 가정은 해볼 수있다.『동국여지승람』은 『고려 예종 원년(1106년)에 두차례,조선 선조 30년(1597년)에 한차례의 커다란 지진으로 인수봉이 무너져 지금의 모습을 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지진이 나기전 인수봉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지금보다 오르기 수월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다.이제까지 국내 산악계에서는 영국인 클리프 아처가 한국인 임무(林茂)와 함께 1926년 5월 처음 인수봉에 올랐다는 이야마 다쓰오(飯山 達雄.94년 작고)의 주장이 정설로 전해져 왔다.그러나 지난해 영국산악회에서 아처의 인수봉 등반기(1936년)가 발견되면서 종래의 이같은 주장에 쐐기를 박았다.아처는 1919년부터 1934년까지 한.일 양국에서 근무했던 외교관이었다 .그는 1922년 인수봉을 처음 보았다.그후 경성(서울)주재 영국 총영사관 부영사로 근무하던 1929년 9월 인수봉에 올랐다.당시 동반자는 한국인 임무가 아닌 ER 페이시(영국)와 S 야마나카(일본)라고 기록돼 있다.
아처는 『백운대 에 올라 인수봉 루트를 정찰하던중 정상에 누군가 올라있는 것을 보았다』고 자신의 등반보고기에서 소개하고 있다.이는 아처가 오르기 전 이미 다른 사람이 올랐음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다.구한말 법무대신을 지냈던 신기선의 『유북한산기(遊北 漢山記)』에도 중요한 기록이 있다.1889년 10월 북한산을 들른 신기선은 『영남에 사는 김씨성을 가진 사람이 홀로 인수봉을 오른 후 깃발을 꽂았다』는 순검(巡檢.현 순경)의 이야기를 적고 있다.이를 종합해 볼 때 아처의 등반기는 기록상의초등일 뿐 그 이전에도 인수봉을 오른 사람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인수봉 정상에 세워진 돌탑이나 희미한 흔적만 남아있는 마애불상의 모습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조선 숙종 때노적봉 밑에 있었던 중흥사 주지 성릉의 『북한산지』에는 당시 북한산에 11개의 사찰과 2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전한다.따라서북한산에서 수도하던 승려가 이런 흔적을 남긴 것일 가능성도 있다.풍화작용으로 심하게 마모된 돌탑과 마애불상에 대한 학계의 고증이 이뤄져야만 인수봉 초등에 대한 의문도 풀릴 것이다.
이용대 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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