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9. 청와대 시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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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월, 청와대 근무를 위해 가족과 함께 서울로 돌아왔다. 오는 길에 파리 에 펠탑 앞에서. 오른쪽은 가사도우미.

 1968년 1월, 무장공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침입기도사건, 푸에블로호 피납사건 등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가 초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한·미 관계가 어느때보다 중요해졌다. 청와대에서 미국담당 1급 비서관으로 오라고 전갈이 왔다. 아내와 1남2녀를 데리고 파리, 도쿄를 거쳐 3월15일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 도착해 보니 대미 비서관 자리는 무슨 정치적 이해관계가 있었는지 당분간 경호실 보좌관(차장 1급)으로 있으라 했다. 싫다고 할 수도 없고 당분간 있기로 했는데 계속해서 경호실 소속이 되어 버렸다.

69년 1월, 박종규 경호실장과 둘이서 닉슨 미국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대통령 연설대가 그냥 보면 보통 연설대인데 투명한 알루미늄으로 둘러 모든 각도에서 방탄이 된다고 했다. 가격이 당시 10만 달러라고 했다. 우리에게 그런 돈이 있을 리 없었다. 귀국한 뒤 박실장이 연설대 안에 철판을 둘러 방탄용을 만들었다. 74년 8·15 때 문세광이 쏜 총에 육영수 여사가 맞았지만 박 대통령을 향해 쏜 총알은 연설대를 뚫지 못했다. 철판이 우그러지기만 했다. 어쨌든 방탄 역할은 한 것이다.

70년 1월에 한국은 미국에 특별군사원조 5000만 달러를 요청했다. 통과가 어려워지자 청와대에서 나를 파견했다. 통신과장을 대동하고 가서 매일 진행사항을 보고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잘 몰랐는데 군사원조는 하원·상원 양원의 외교·국방위원회를 다 통과해야 했다. 한쪽이 통과하면 한쪽이 걸리곤 했다. 아는 친구들을 다 동원했다. 워싱턴의 유명한 컬럼니스트 잭 앤더슨까지 동원해 풀브라이트 상원 외교위원장을 만나게 했다. 귀국해서 결과를 보고하는데 박 대통령이 한참 듣더니 “네 이야기를 하나도 못알아 듣겠다. 통과된거냐” 하기에 “통과는 됐습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71년 대선을 앞두고 3선 개헌을 추진했다. 미국이 3선을 허용할 지가 큰 문제였다. 국회사절단 형식으로 장경순 부의장이 앨버트 미국 국회의장을 만나러 갈 때 내가 수행하게 됐다. 3선 문제를 놓고 누구와 이야기 할 상태가 아니었다. 내가 하루 먼저 귀국했는데 박 대통령이 불렀다. “뭐라 하더냐”고 물어보는데 나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장의장이 들어오면 보고할겁니다”만 반복했다. 장의장은 다음날 “미국이 반대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이때 점수를 많이 잃었다. 곧 3선 개헌을 하고, 계엄령이 선포되고,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이뤄졌다.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 취임식을 했는데 행사 끝나고 대통령이 나가자마자 대형 사진액자가 떨어졌다. 아주 불길한 느낌이었다.

국회에 유정회가 생길 때 국회의원이 되라는 권고가 있었다. 나는 4·19를 겪으면서 정치에는 정이 떨어졌기에 사양했다. 그랬더니 박종규 실장이 다른 사람들에게 “국회의원 하라고 해도 안하는 이상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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