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 구하는 자여! 그대 ‘몸의 왕국’의 왕이 되라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3호 33면

바알신전 안뜰에서 쥬피터신전으로 올라가는 정면의 전경. 저 멀리 6개의 쥬피터신전 기둥이 보인다. 정면 계단이 35계단인데 로마인들은 반드시 첫 계단을 오른발로 딛고 끝낼 때 오른발로 딛는 습관이 있었다. 신전 토대에 쓴 돌들은 보통 하나가 1000t이나 된다. 그 어마어마한 돌을 어떻게 주무르고 운반했는지, 도무지 상상하기 어렵다.

제8장
1 그리고 그가 가라사대, “사람된 자는 슬기로운 어부와도 같도다. 그는 그의 그물을 바다에 던져 작은 고기가 가득찬 채로 바다로부터 끌어올리는도다.
2 그 가득한 고기 가운데서 슬기로운 어부는 잘생긴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하는도다.
3 그는 모든 작은 고기를 다시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가려 얻는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76. 큰 고기와 작은 고기

1 And he said, “The human one is like a wise fisherman who cast his net into the sea and drew it up from the sea full of little fish.
2 Among them the wise fisherman discovered a fine large fish.
3 He threw all the little fish back into the sea, and chose the large fish without difficulty. Whoever has ears to hear, let him hear.”

도마복음은 펴보고 또 펴볼수록 미궁이다. 너무도 아리송하다. 어부가 바다에서 많은 고기를 낚아 올렸을 때 잔챙이는 바다로 돌려보낸다든가, 낚시꾼이 일정한 수치 이하의 송사리를 잡았을 때 다시 풀어준다는 이야기는 이미 우리의 상식이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도마복음은 우리에게 이런 생태론적 상식(ecological common sense)을 가르치고 있는 또 하나의 성경일까? 도대체 이 말이 무엇인가?

우선 여기 발설자로서의 주어가 ‘예수’로 명기되어 있지 않고 ‘그’라는 대명사로 되어 있다. “그가 가라사대”는 명백히 이 예수의 말씀을 연출하고 있는 내레이터의 존재를 드러내주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로기온에는 내레이터와, 예수와, 예수의 말 속에 있는 어부, 이 삼자의 관계가 얽혀 있다.

레바논 안티레바논산맥 중턱에 있는 이 쥬피터신전은 전 로마제국을 통하여 가장 거대한 신전이었다. 로마인들은 자기들의 수도인 로마에는 막상 거대한 건물을 짓지 않았다. 로마제국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는 이방의 통치지역에 막대한 신전을 지어 그 지역민들을 압도시켰던 것이다. 이 쥬피터신전은 폼페이우스장군 때부터 짓기 시작하여(BC 64) 쥴리어스 시저·옥타비아누스 시대를 거쳐 네로황제 때(AD 60) 완성되었다. 내가 서있는 이 6개의 기둥 잔해는 세계에서 가장 큰 돌기둥이다(높이 22.9m). 이러한 돌기둥이 직사각형 신전 둘레에 54개 서있는 모습은 장관이었을 것이다. 이 신전들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파괴되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황제 때 잠깐 회복되었다가 다시 파괴되었다. 비잔틴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황제(AD 527~65 재위)는 이 기둥을 실어다가 콘스탄티노플의 소피아성당 기둥으로 썼다. 임진권 기자

여기서 어부는 바로 제1장에서 말하는 예수의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다. 여기서 ‘어부’는 ‘사람된 자’의 직유(simile)적 표현이다. ‘사람된 자’라는 표현도 참 절묘하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the human one)이다. 사람다운 진정한 사람, 그러니까 예수의 신비로운 말씀의 해석을 발견하는 자이다. 그 해석을 발견했기에 고통스러워하고, 또 고통스럽기에 희열을 느끼는 왕자(王者), 내면의 사자를 삼켜 먹어버리는 그 왕자는 여기 ‘슬기로운 어부’라는 직유의 대상으로서 다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복음 5:1~7에 보면 예수가 시몬의 배에서 가르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고, 그 고기를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코 그 고기를 버린다는 발상은 없었다.

요한복음 21장을 보아도 부활하신 예수가 시몬 베드로에게 그물을 끌어올리라 하니 거대한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나 되었다. 우리가 주일학교 때부터 배우는 예수는 어부가 많은 고기를 낚듯이 우리에게 복을 많이 가져다주는 예수다. 예수를 믿으면,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고기가 꽉 차듯이, 집이 가라앉을 정도로 복이 가득차는 것이다. 만복(萬福)의 근원 하나님, 만복의 예수다. 그러나 도마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예수는 분명히 그러한 예수와는 다른 모습이다.

본 장의 문장을 잘 뜯어보면 작은 고기가 가득찬 채로 그물이 올라오는 모습이 먼저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가득찬 고기 가운데서 큰 고기 한 마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발견은 했지만 그 큰 고기는 가득찬 작은 고기들에 가려서 보이질 않는다. 발견은 했지만 아직 그 큰 고기를 손에 얻지는 못한 것이다. 그 고기를 손에 넣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슬기로운 어부의 ‘슬기’는 바로 그 작은 고기들을 다시 바다 속으로 버리는 데 있다(to throw them back into the sea). ‘건짐’의 지혜가 아니라 ‘버림’의 지혜인 것이다. 버림으로써 큰 고기를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어려움 없이” 그 큰 고기 한 마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신앙이든, 은혜든, 축복이든, 성령이든, 모든 것을 얻기만 하는 기독교에 너무 익숙해 있다. ‘버리는’ 기독교를 배우지 못했다. 이 도마복음서는 베드로 중심의 어떤 초기 사도집단의 윤리에 반항하는 예수운동의 모습일 수도 있다. 예수의 말씀을 해석하고 발견하는 자는 모든 것을 긁어모아서는 아니 된다. 하나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를 위해서 사소한 아이덴티티를 버려야 한다. 그래야 그 최종적 목표에 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왕필(王弼, 226~249)이『주역』을 해석하는 데 이런 말을 하고 있다:
“말(言)이란 상(象)을 밝히기 위한 것이므로 상을 얻으면 말을 잊어버려야 한다. 상(象)이란 뜻(意)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므로 뜻을 얻으면 상은 잊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마치 올가미가 토끼를 산 채로 잡기 위한 것이므로 토끼를 얻은 후에는 올가미는 버리는 것과 같다. 그물은 고기를 산 채로 잡기 위한 것이므로 고기를 얻은 후에는 그물은 버리는 것과 같다.”(言者所以明象, 得象而忘言; 象者所以存意, 得意而忘象. 猶蹄者所以在兎, 得兎而忘蹄; 筌者所以在魚, 得魚而忘筌也.)

도마복음서는 바로 이 “득어망전”(得魚忘筌)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 마태복음 13:47~50에는 도마복음의 이 장을 연상시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의미의 왜곡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

최종적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는 순수한 “버림”의 도마복음 논리가 마태복음에서는 선·악의 이원론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귀가 있는 자들이여! 누구든지 들어라! 긁어모으기만 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 버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