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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담>서울주재 英.佛문화원장이 말하는 한국의 文化인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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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한국의 문화인프라를 주제로 한 서울주재 영국문화원장.프랑스문화원장간의 대담은 지난 9일 본사 인터뷰룸에서 1시간30분동안진행됐다.유럽의 문화선진국을 대표하는 이들은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의 문화예술시설,관습.제도.정책에 대해 받은 인상과 느낀 문제점을 솔직하게 피력했다.프랑스문화원장 클레르 베르제-바숑(45)은 소르본대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파리시청 문화사업국조형예술담당관,리옹오페라좌 행정관,리옹시청 도서.무용.음악.연극담당관을 역임하고 지난해 서울에 부임했다.영국문화원장 테리 토니(44)는 런던대 독일어및 철학석사,랭커스터대 언어학석사등을 마친 뒤 일본.콜롬비아.브라질의 영국문화원을 거쳐 94년 서울에 왔다.
[편집자註] -한국의 문화예술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고 인상깊었던 것은 무엇인가.
▶토니=역사 유적지와 유물에 관심이 많으며 특히 해인사를 좋아한다.경치가 뛰어나고 불교적 전통을 느낄 수 있으며 팔만대장경이 있고 은둔생활을 하는 승려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외국인에게 매혹적인 장소는 역시 인사동이다.화랑이 밀집해 있고 길가에 조각품이나 도자기가 전시돼 있으며 전통 찻집이나 한식당에서는 고전음악이 나온다.그렇다고 인사동 도처에 영어안내판을 붙여 분위기를 망쳐서는 안된다.대신 식당이나 찻집을 안내하고 거리와 화랑들에 대해 설명을 해줄 가이드가 있으면 좋겠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캐나다인은 비원에서 인사동을 거쳐 종묘나탑골공원까지 도보로 곳곳을 안내하는 가이드를 하고 있다.
▶베르제-바숑=서울이란 도시 자체가 대단히 인상적이다.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수평적 생활과 수직적 빌딩이 교차되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또한 거리 곳곳에 세워놓은 조각이나조형물은 세계의 다른 어느 도시보다 숫자가 많은 것같다.동대문시장.남대문시장.황학동 벼룩시장도 인상깊은 곳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시설은 충분해 보이는가.
▶베르제-바숑=예술의전당은 파리의 어느 곳보다 나은 현대적이고 훌륭한 시설이다.서울의 경우 대형 음악당이나 소형 연극공연장은 충분해 보이지만 5백~6백석 규모의 중소형 공연장은 부족하다.이런 곳이 오히려 보통사람들이 저녁에 마음편 하게 음악회등을 즐길 수 있는 장소다.
▶토니=문화시설이나 단체가 서울에만 몰려있는게 문제다.LG가창원에,현대가 울산에 큰 콘서트홀을 갖고 있으며 인천에는 좋은문화회관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러나 그곳에서 얼마나 활발히 공연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비원은 가이드를 따라다녀야 하는 단체관광만이 허용되는 것이 아쉽다.공원으로 자유롭게 출입을 허용해도 좋지 않겠는가.
-한국에서 문화예술을 즐기는데 불편한 점은 무엇인가.
▶베르제-바숑=정보 부족과 예약의 불편이다.지도를 구하기 어렵고,교통편도 알 수 없고,거리 곳곳에 있어야 할 안내표지판이없다.영화를 보려면 상영시간표도 모르고 무작정 극장으로 가야 한다.전화예약제도는 영어 서비스가 안돼 쓸모가 없다.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람들이 짧은 영어에 몸짓까지 섞어가며 친절하게 도와주려고 한다는 점이다.프랑스의 경우 관광객이 묵는 호텔에서 연극.영화.식당등 모든 것을 대신 예약해준다.한국에서도 이런 서비스를 했으면 좋겠다.국립중앙박물 관이 이전을 위해 문을 닫고 있어 한국의 문화유물을 제대로 볼 수 없어 불편하다.
▶토니=도로 안내판이 충실치 못하고 주유소나 식당등에서 영어가 통하지 않는 점이 불편하다.이것은 사람들의 친절함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한국의 현대예술을 감상할 곳이 거의 없는것은 아쉬움이다.
한국에도 그곳에만 가면 모든 문화적 욕구가 해결되는 거리가 있으면 좋겠다.런던의 웨스트엔드 지역에는 영화관.극장.오페라 하우스.야외극장.발레공연장.레스토랑.술집등 없는 것이 없다.여행자들은 이 부근에 묵는 것을 선호한다.서울 동숭 동 대학로에는 극장과 영화관.레스토랑이,신촌에는 영화관.식당.작은 술집들이 있을 뿐이다.예술의전당은 주변에 편안한 레스토랑이나 술집이없다.남산 국립극장은 당황스러운 장소다.거기 가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적 지원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좋다고 생각하는가.
▶토니=영국의 예를 들면 문예지원금은 중앙정부.지방정부.기업.복권공사등 4곳의 원천을 갖고 있다.정부기금은 예술가평의회.
영화협회.공예협회등을 통해 다시 하부의 문화예술단체로 배분된다.지방정부는 극장.박물관.미술관등 문화시설과 문화 이벤트등에 돈을 댄다.기업이 문화행사를 후원하는 스폰서 제도도 활발히 운영되고 있다.마지막으로 2년전에 시작한 복권사업 이익금이 있다.큰 프로젝트가 있으면 복권공사에 예산지원을 요청한다.이익금의상당부분이 여기에 쓰인다.한국의 가장 비싼 티켓이 15만원선인데 비해 영국에선 10만원 이내인 것은 이런 다양한 지원의 결과다.한국의 경우 정부의 문예기금이나 사설기금은 각각 특정한 단체나 개인에 선별적으로 지원된다.그러나 특정한 하나의 재원에의존하면 거기에 종속되 게 마련이다.여러 통로로 다양한 지원을중복되게 받는 편이 좋다.
▶베르제-바숑=초대 문화장관이던 앙드레 말로가 60년대에 시작한 예술가 보호정책을 소개하고 싶다.
파리 시내 제14구의 아틀리에 밀집지역이 철거대상이 됐을 때말로는 파리시 당국과 협의해 다른 지역에 이들이 옮겨 살 수 있도록 배려했다.재개발구역이 생기면 반드시 별도로 일정한 예술가 주거지역을 마련토록 한 이 정책은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다.
앞으로 도시계획을 짤 때는 문화시설 설치에 우선권을 주는 방안도 강구돼야 한다.
또한 외무부에 소속된 문예진흥협회(AFAA)가 외국에서의 프랑스 문화 소개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20일부터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세자르전을 포함,모든 문화행사는 이 창구를 통하고있다.한국도 자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대외창구를 확대,활성화하는것이 좋을 것이다.
-문화를 대하는 한국사람들의 모습에 대해 말한다면.
▶토니=한국에서는 문화가 일상생활을 즐기는 방법이 아니라 무슨 특별한 행사처럼 인식되고 있는 것같다.
유럽에서는 시와 대학.문화단체등이 합심협력해서 다양한 문화축제를 계속 벌인다.문화와 생활을 일체로 만드는 노력의 하나다.
한국에서는 문화가 더 대중화.생활화돼야 한다.예컨대 대중음악이나 뮤지컬의 경우 젊은이만을 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베르제-바숑=광주 비엔날레가 대성공을 거둔 것을 보면 문화에 대한 한국사람들의 관심과 수요는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 수있다.문화시설.공연단체가 부족한 것이지 잠재적인 관객은 많다는의미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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