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역사] 58. 통일 연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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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 TBC의 스튜디오 전경. 초기에는 신세계 백화점 안에 세트장을 지어 사용했다.

1964년 출범한 TBC(동양방송) 측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일일 연속극을 하자고 했다. 냉큼 내키지는 않았다. 라디오 드라마를 한달간 쓰면 영화사에 팔려 목돈이 생기는데 TV로 나가면 누가 사겠는가. 또 원고료를 얼마 줄 수 있는가. 그러나 한국 최초의 일일 드라마? 거기에는 묘미가 없지도 않을 것이다. '어느 하늘 아래서'가 생각났다. 홍성기 감독이 90% 정도 찍다가 부인 김지미를 빼앗기는 바람에 그만뒀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이가 그동안 커버렸다. '눈이 내리는데'로 가자. TV 드라마는 나도 익숙한 편이 못 되지만 신세계 백화점 안에 지은 세트는 너무나 안쓰러웠다. 황은진이 열심히 연출하는데 도무지 맛이 싱거웠다.

MBC에서 청탁이 왔다. 조선일보를 읽는데 미국에서 어느 대학교수가 손녀를 찾으러 한국에 왔다는 기사가 눈에 확 들어왔다. 광복 후 많은 미군이 한국 여성들과 사귀었지만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아이를 낳은 경우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미군들은 그들 나라로 휙 떠나면 그만이다. 그런데 미군이었던 아들이 뿌려놓은 씨앗을 찾으러 왔다? 한국 비극의 한 사례다. 제목은 '머나먼 아메리카'라고 했다. 이규태 기자가 쓴 것이었다. 오늘날 조선일보의 '이규태 코너'는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나중에 TBC는 '머나먼 아메리카'를 '하베이촌의 손님'이라는 제목의 TV 드라마로 만들었다. 영화로 찍었으면 세계 시장도 넘볼 수 있을 만한 작품이었다. 아쉬움이 남아 있다. 미 캘리포니아대의 어느 교수가 정년퇴직 후 아들이 버리고 온 한국 여자와 그의 딸을 찾아온다. 문산.동두천을 다 뒤지며 수소문한다. 절망에 부닥쳤을 때 찾아낸다. 파란 눈의 계집애는 귀엽게 생겼다. 데리고 가겠다고 하니 어미가 "노!"한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잘 길러줄 것이라는 희망에 마침내 "예스"한다. 명동 입구 한 보석상에서 며느리한테 선물을 사준다. 눈물을 삼키며 정자옥 쪽으로 건너간 어미가 뒤돌아보는 순간, "엄마!"하고 달려가던 아이가 차에 치여 숨진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 꼭 누군가를 죽이는 잔인성이 있는 것 같다.

나는 미국에 안 가봤다. 거대한 부자 나라. 세계를 내려다보며 사는 오만이 없는가 의심하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양식이 있다는 증거는 이따금 영화에서 보았다. 그런데 왜 그렇게 '머나먼 아메리카'로 느껴졌을까. 그때만 해도 미국은 한국인에겐 너무나 먼 나라였다.

시청 앞을 지나가다 립스틱을 빨갛게 바른 한떼의 아가씨들을 봤다. 하이힐을 신고 고급 옷을 입었다. 지켜보니 건너편에 새로 생긴 호텔로 들어갔다. 한.일관계가 정상화된 이후 일본인들이 많이 우리나라를 들락거렸다. 그들은 대부분 현지처를 둔다고 했다. 그것은 대단한 변화다. 그대들, 먹고 살기 위해 무슨 짓을 못할까마는 꼭 그렇게 가야만 하는 것인가. 나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나는 '봄부터 가을까지'를 '여성동아'에 연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이야기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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