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문화] 러시아선 틈나면 "공연장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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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28일 모스크바 중심가 볼쇼이 극장 앞에서 관람객들이 발레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지난달 28일 오후 6시30분쯤 모스크바 시내 중심가 '테아트랄나야 플로샤지'(극장광장)에 위치한 러시아 공연예술의 메카 볼쇼이 극장 앞. 깔끔하게 차려입은 남녀노소 관객들이 7시 공연을 앞두고 겹겹이 줄을 서 있다. 상당수 관객들은 이미 입장을 마쳤다.

이들은 바로 전날 시상식이 열린 모스크바 국제발레상(賞) '발레 베누아'의 올해 수상자들과 역대 수상자들이 함께 펼치는 갈라 공연(하이라이트로 구성된 특별공연)을 보려고 찾아왔다. 표값이 보통 40~50달러(약 4만8000~6만원), 최고 130달러에 달했지만 2000여 관람석은 거의 다 찼다. 모스크바의 월 평균 임금이 약 400달러로 올랐음에도 상당수 시민들은 여전히 150~200 달러의 월급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동료를 기다리며 연신 시계를 쳐다보던 직장인 코스차(35)는 "표 값이 너무 비싸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긴 하지만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을 감상하는 데 그 정도는 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1991년 국제연출가동맹이 창설한 '발레 베누아'상은 그동안 발전을 거듭해 '발레의 오스카상'이란 별명에 걸맞을 정도로 자리를 굳혔다. 세계적으로 내로라 하는 춤꾼과 안무가들이 이 행사에 참여하려고 모스크바를 찾는다. 이날 콘서트에는 특히 아르헨티나 발레리노 훌리오 보코와 파리 국립오페라의 간판 발레리나 엘리자베트 플라텔, 볼쇼이의 스타 발레리노 니콜라이 치스카리제 등 거장들이 출연, 화려한 무대를 연출했다. 극장 안은 열광하는 관객들의 환호와 박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다음날인 29일 볼쇼이 극장에서 멀지 않은, 모스크바 체호프 예술극장도 붐비기는 마찬가지였다. 연극전용 극장인 이곳에서는 이날 영국 작가 서머싯 몸의 2막 연극 '성화(聖火)'의 초연이 열렸다. 920석 규모의 극장이 꽉 찼다. 입장료는 4~30달러로 볼쇼이 극장만큼 비싸지는 않지만 서민들에게는 역시 만만찮은 액수. 극장 앞에서 만난 회사 경리 나제즈다(55.여)는 "표값이 올라 한달에 1~2번밖에 극장엘 못 온다"며 공연히 겸연쩍어 했다.

영상 예술의 발달로 다소 위축되긴 했지만 공연 예술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애정은 여전히 뜨겁다. 영화 스타보다 연극 스타가 더 인기를 누리는 나라가 러시아다. 현재 모스크바에만 발레.오페라.연극 등을 공연하는 크고 작은 극장이 모두 130여개. 연중 수백편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진다. 개방 이후 비싸진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극장은 여전히 문전성시다.

인기 레퍼토리는 몇 세대에 걸쳐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모스크바 고리키 예술극장에서 공연되는 스타니슬라프스키 연출의 연극 '파랑새'는 약 100년, 바흐탄고프 극장에서 공연되는 바흐탄고프 연출의 '투란도트 공주'는 약 80년이나 이어지고 있다. 지방 도시의 극장 수준도 모스크바에 별로 뒤지지 않는다. 세계적 연출가들이 지방 극장에서 활동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수도와 지방 간 문화 격차가 심하지 않다는 얘기다.

당연히 관객들의 수준도 만만치 않다. 러시아인들은 갖고 있는 옷가지 중 가장 멋진 옷을 차려 입고 극장을 찾는다. 정장이나 단정한 옷차림은 꼭 갖춰야 할 예의다. 많은 이들이 극장의 명성보다 연출가와 출연자들의 이름을 보고 공연을 선택한다. 자주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들의 줄거리는 대충 꿰고 있다. 관객층도 두터워 청년.중년.노년층이 골고루 극장을 찾는다. 초.중.고 학생들의 교육과정에는 주 1~2회 공연 관람이 필수다. 공연예술에 대한 국가의 지원도 대단하다. 극장 운영비의 70% 정도는 연방정부나 시 정부 예산에서 지원된다. 나머지 30% 정도만을 공연수입에 의존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연극 애호가로 유명하다. 최근 두 달 사이 모스크바 시내 일반 극장에서 러시아 유명 극작가 오스트롭스키의 작품 '뇌우'와 '최후의 희생자'를 잇따라 관람했다. 문화부 장관은 각종 예술행사에 수시로 참석한다. 수많은 러시아 극장들이 수준높은 작품들을 끊임없이 공급할 수 있는 저력도 이같은 폭넓은 관심과 국가적 지원에 힘입은 것이다.

모스크바=유철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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