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마른 산업현장 “기계 못 사고 공사도 중단” 중소기업에 직격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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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안산의 최모씨는 최근 은행에 기대 굴착기를 구입하려다 포기하고 말았다. 기존 굴착기가 노후해 새것을 마련하는 데 1억6000만원이 드는데 은행이 1억원의 지급보증을 섰다가 해지하겠다는 연락이 왔다는 것. 그는 “저축은행이나 캐피털회사에 찾아가 봤지만 금리가 너무 높아 빌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굴착기 한 대가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는데 은행 돈이 막히면 하루아침에 백수가 될 판”이라고 한탄했다.

최씨 지급보증을 섰던 한 은행의 담당자는 “은행도 자금이 넉넉하지 않은 데다 리스크를 줄이려 신규대출이나 대출연장을 가급적 보수적으로 하고 있다. 최씨와의 당초 약정금리 7%로는 돈을 빌려주기 힘들다”고 밝혔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장이 산업현장으로 확산되고 있다. 자금경색을 겪는 시중은행들이 대출 창구를 좁히면서 돈을 구하지 못한 사업자들이 일을 못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증가액(잔액 기준)은 7월에 6조원대였지만 8월에는 2조원대로 쪼그라들었다. 은행들이 위험관리를 강화하면서 중소기업 대출을 꺼리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산업계에선 규모가 작고 신용이 부족한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개인사업자들이 먼저 직격탄을 맞았다. 업계에선 금융경색이 장기화할 경우 신규 투자나 채용 계획 축소가 대기업에까지 확산될 것으로 점친다.

전북 군산의 컴퓨터 모니터용 액정디스플레이(LCD) 제조업체인 코리아데이타시스템스(KDS)는 TV용 LCD 사업에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계열사를 통해 해외 업체에 TV용 LCD 납품을 추진하고 일부 수주까지 받았으나 사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전환사채 발행에 실패하고 만 것. 주식시장의 불안이 계속되자 전환사채를 구입하려는 투자자가 몰리지 않은 때문이다.

KDS 관계자는 “신규사업 진출을 위해 19억9900만원 규모의 전환사채 발행을 추진했다. 하지만 청약자가 없어 전량 미발행 처리됐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전환사채를 다시 발행할지에 대해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건설 현장에서도 운전자금이 끊기면서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가 잇따랐다. 대구시 수성구에 건설 중이던 808가구 규모의 아파트 단지 중 일부(2차 298가구)가 공정률 20%대에서 공사가 전면 중단됐다. 1차 510가구도 공사지연으로 당초 지난달 말에서 올해 연말로 입주 시기가 늦춰졌다.

금융권에서 시공사에 지급하기로 했던 프로젝트 파이낸싱(PF)을 연장해 주지 않은 것이 주 원인이다. 이 아파트 단지의 시공사인 C&우방건설 관계자는 “금융권에서 운전자금을 대출해 주지 않는데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하다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몰릴 수 있어 부득이 공사를 중단했다”고 설명했다.

총사업비 2조5000억원 규모의 인천 도시개발사업(SK건설 컨소시엄의 인천 도하지구 개발사업)도 공사가 두 달째 중단됐다. 컨소시엄에 재무적 투자자(FI)로 참여한 금융권이 예정된 공사비 대출을 미룬 탓이다. 컨소시엄에 참여한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쓰나미가 어디까지 미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투자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금융 불안은 기업 간 거래 역시 더디게 한다. C&중공업은 최근 철강사업 부문을 매각하기로 하고 현진스틸과 교환했던 양해각서(MOU)를 무효화했다. 이 회사는 매각대금을 신규사업인 조선 사업에 투자해 수주 선박의 건조비용으로 쓸 계획이었다. 하지만 최근 주식시장 불안이 계속되자 주식 보유자들이 너도나도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하겠다고 나서면서 현진스틸이 인수를 포기한 것이다.

시중은행의 한 관계자는 “금융 경색으로 돈이 부족하고 경기가 좋지 않아 신용등급이 낮은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에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 당분간 대출을 해준다 해도 금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장정훈·함종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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