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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클로즈 업] 태몽은 前生이력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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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와 역술가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지인지감'(知人之鑑)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감식력'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대부분의 승부는 여기서 갈라진다. 결국 사람이 문제다.

중국 당나라 때는 사람 보는 기준을 신(身).언(言).서(書).판(判)에서 찾았다. 얼굴 생김새.스피치 능력.문장력.판단력이 그것이다. 그러나 실전에 대입해 보니까 이 네가지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추가할 항목이 있다. 그 사람의 태몽이 무엇인가, 사주가 무엇인가, 태어난 집터가 어떤가를 추가로 체크해 볼 필요가 있다. 신.언.서.판 네가지가 현상에 드러난 부분에 대한 체크라고 한다면, 태몽.사주.집터라는 세가지 요소는 드러나지 않고 배후에 잠복해 있는 부분이다.

나는 비범한 인물을 만날 때마다 이 일곱가지 기준을 적용하면서 크로스 체크를 해본다. 제1번 질문은 그 사람의 태몽 이 무엇인가부터 물어본다. 태몽이란 '전생 이력서'다. 전생에 그 사람이 도달했던 삶의 경지. 그 경지가 압축돼 나타나는 한 장면이 태몽이다. 4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올 때 잠깐 보이는 한 장면. 달리 표현하면 전생에서 현생으로 이월돼 넘어온 종자돈이라고나 할까. 어떤 사람은 종자돈이 아예 없이 마이너스 통장을 가지고 현생으로 뛰어든 사람도 있고, 반대로 두둑한 적금통장을 가지고 넘어온 사람도 있다. 권투로 표현하면 플라이급에서 뛰다가 넘어온 사람도 있고, 미들급으로 활약하다가 넘어온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전생이 헤비급 출신이면 현생에선 헤비급부터 시작한다. 알고 보면 인생은 스타트 라인이 각기 다른 것이다. 하지만 현생에 열심히 노력하면 플라이급이 밴텀급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덕을 쌓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하다 보면 헤비급도 웰터급으로 추락할 수 있다.

한번 읽으면 외워버리는 강인한 기억력과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자존심, 이판과 사판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신산(神算)의 소유자였던 야산 이달. 이처럼 신출귀몰한 인간의 태몽은 무엇이었을까? 야산의 넷째 아들이 역사학자인 이이화(李離和) 선생이다. 이선생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야산의 태몽은 봉황이 오동나무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 이름을 '봉'(鳳)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면 사신수(四神獸)가 보인다.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작, 북쪽에는 현무다. 태몽에 이 사신수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그 태어난 인물은 A급으로 단정한다. 청룡이 보이면 정치인이 많다. 청룡은 힘이 좋으므로 사람들을 몰고 가는 추진력이 뛰어나다. 백호는 살생(殺生)의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백호 그림을 잘 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터에 가면 나라를 구하는 장군이 되기도 한다. 태몽에 백호가 보이면 장군이나 뛰어난 전사(戰士)로 본다. 조선 초기 남이(南怡)장군을 죽였던 유자광(柳子光)의 태몽은 아버지가 꾸었는데, 백호가 배 속으로 들어와서 꿈틀거리는 꿈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는 아마 '암 백호'가 아니었을까 싶다.

백호와 비슷한 맥락의 동물이 백마다. 필자가 입수한 노무현 대통령의 태몽은 키가 큰 백마였다. 노대통령 어머니 꿈에 수염이 허연 노인이 나타나 키가 큰 백마의 고삐를 쥐어 주면서 데리고 가라는 꿈을 꾸었다. 너무 커다란 말이라 처음에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 노인이 자꾸 몰고 가라고 해서 엉겁결에 고삐를 쥐었더니 의외로 순순히 백마가 따라왔다고 한다. 백마는 장군이 타는 말이다. 만약 노대통령이 20세기에 태어나지 않고, 임진왜란 때 태어났더라면 이순신 장군 다음 가는 전공을 세웠을지도 모른다.

봉황(주작)은 군왕이거나 또는 대 도인이 많다. 시절 인연이 맞으면 군왕이 되는 것이고, 맞지 않으면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도를 닦는 대 도인이 된다. 도인이더라도 많은 사람 앞에 나타나는 활동을 한다. 봉황은 날개와 꼬리가 화려하므로 세상에 나타나서 많은 활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현무는 거북이와 뱀이 엉켜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북쪽과 겨울, 그리고 물을 상징한다. 생명의 잉태를 형상화한 모습이다. 겨울에는 겨울잠을 자면서 한편으로는 생명을 잉태하는 준비기간이기도 하다. 남자의 성기는 거북이의 대가리인 귀두(龜頭)와 흡사하고, 여자의 성기는 뱀의 입인 사구(蛇口)와 비슷하다. 귀두가 사구와 만나야 생명이 온다. 거북이와 뱀이 엉켜있는 현무의 모습은 생명의 잉태이자 잠복, 그리고 은둔을 암시한다. 현무의 태몽은 깊은 명산에서 내단(內丹)을 연마하는 도교의 수행자, 즉 신선을 가리킨다.

태생부터가 봉황과 인연이 깊었던 야산은 거침없이 세상을 훨훨 날아 다녔다. 불행하게도 그가 대부분 활동한 시기는 일제라는 암흑기였다. 밝은 대낮이 아니라 컴컴한 하늘을 날아 다니는 봉황이었던 것이다.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여행했던 곳도 경북 예천군 감천면 자봉리(雌鳳里.암봉리)였다. 거동이 불편한 나머지 제자의 등에 업혀 자봉리를 갔다온 뒤 운명했다. 알파와 오메가가 모두 봉황이었다.

조용헌 원광대 초빙교수, 江湖東洋學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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