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禪을찾아서>1.운문산 大覺禪寺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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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운문산 대각선사(속칭 운문사)방장 불원(佛源)화상과의 필담을 위해 기자는 휴대용 휴지위에 서툰 한문을 써나갔다.휴지의 사용은 오물에 대한 이야기의 격(?)을 갖추고자함이었다.
원래 간시궐은 설봉의존선사의 법제자인 운문문언(雲門文偃.864~949)선사의 선문답에서 나온 유명한 화두다.운문은 어느날『부처란 무엇인가』라는 한 중의 질문에 거침없이 『마른 똥막대기』라고 답했다.부처가 똥막대기라니 참으로 초상 출격(超常出格)의 선문답이다.
운문의 간시궐은 한마디로 자기자신이 곧 부처인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고 중생심속에서 부처와 중생을 구별짓고 있는 어리석은 질문자 자신을 가리킨다.똥막대기(비천한 중생)도 깨치면 부처가될수 있다.
그러니까 간시궐은 우리 모두가 부처와 동등한 절대가치인 「참된 자기(佛性)」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깨치지 못해 비천한 똥막대기 신세로 있음을 비유한 상징물이다.이때의 간시궐은 무분별의절대평등속에서 방편적으로 인정한 「차별」일 뿐이 다.
운문은 질문자가 개념적으로 말하는 부처를 간시궐이라는 기상천외의 구체적 물건으로 제시함으로써 범성(凡聖)을 구분하는 분별심과 깨침을 밖으로부터 얻으려는 질문자의 망상을 박살내버렸다.
질문자를 너는 똥막대기에 불과할뿐이라고 질타한 운문의 말은 질문자 본인이 바로 부처임을 깨우쳐준 친절한 가르침이 아닐수 없다.다만 중생은 허상인 잠정적 자아(육신)를 본래의 자기로 착각,진아(眞我)를 값어치 없는 똥막대기로 격하시 킨채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간시궐은 운문보다 한세대 앞서 임제종을 개창한 임제선사(?~866)가 먼저 사용했다.한 중이 『차별없는 사람(無位眞人)이란 무엇인가』라고 묻자 그는 『무위진인이란 바로 간시궐이다』고대답했다.임제의현(臨濟義玄)선사의 간시궐도 역시 운문의 그것과같다. 『장자』의 「지북유」편에도 『도(道)가 어디에 있느냐』는 물음에 『똥이나 오줌에도 있다』는 동곽자와 장자의 문답이 나온다.귀천과 정예(淨穢)가 한 뿌리고 결국 동일하다는 선가의만물일여사상과 같은 맥락이다.
운문불원화상(76)의 「모른다」는 대답은 선가의 고유 관용어다.말이나 글로는 도저히 드러낼 수 없는 불가언설의 절대진리를말할때 선은 흔히 침묵이나 퇴행적 동작,「모른다」는 말을 사용한다. 시원은 동토(東土)선불교 초조인 달마가 양무제와의 문답중 『지금 내앞에 서있는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모른다(不識)』고 대답한데서 나왔다.
인도의 선자(禪者)라즈니시(1931~1990)는 선가의 「모른다」는 대답을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답이라고 격찬했다.또독일의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1889~1976)는 『선불교의 진여.자성.불법과 같은 광역(Gegend)에 속 하는 진리는 원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운문종 개산조인 운문은 그 가풍이 황제의 소칙처럼 간명.직절(直截)하다고 해 「천자」라는 평을 듣기도 한 선장(禪匠)이다.운문종풍은 후일 선불교 5가7종을 제패하고 우뚝 선 임제종에흡수돼 임제선풍을 원류로 하는 오늘의 한국불교 선종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은 사람의 심금을 울렸던 「산은 산,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이라는 조계종 성철선사(93년 시적)의 종정취임식 법어도 운문이 상당법어에서 설파했던 화두였다.
운문사를 찾은 것은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3월24일 아침이었다.비를 촉촉이 맞은채 채소밭을 둘러보고 들어오는 불원화상을문간에서 수인사한후 곧장 방장실로 함께 올라갔다.
선승의 권위를 상징하는 주장자와 석장.불자가 가지런히 정돈돼있는 엄숙한 분위기였다.그러나 화상이 권하는 녹차는 따스하기만했다.그는 실질적인 동아시아 선불교 창시자인 6조 혜능조사가 행화를 폈던 선원(禪源)도량 조계 남화선사의 방 장도 겸임중인중국선종의 대덕이다.30세때부터 운문사를 맡아 옛 운문종풍을 오늘에 부활시키고 있는 그는 필담이 끝나자 강주를 불러 사찰안내를 지시했다.
선당.조사전등을 둘러보는 도중 「한국손님 점심공양하라」는 방송이 나왔다.재당(齋堂)으로 가니 방장은 홍콩신도들과 함께 식사중이다.우리가 자리를 잡자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우리 식탁으로 자리를 옮긴다.반찬을 젓가락으로 집어서 우리 일행의 밥 위에다 일일이 놓아준다.옷입고 밥먹으며,대소변을 보는(穿衣喫飯 屎送尿)일상이 곧 지극한 불법의 구체적 현현이며 도의 실천이라는 선가의 평상심이 피부에 와 닿는다.
누런 수건을 가슴에 대고 식사중인 화상이 무심히 한마디 한다.『신경통이 있어 식사때 밥을 좀 흘린다』고.인간은 대체로 자신의 결점을 숨긴다.그러나 그는 적나라한 자신의 실존을 고백하는데 주저치 않는다.
『나는 절름절름,비틀비틀,백천가지 추태를 가졌는데 그런대로 세월을 보낸다』던 약산유엄선사(751~834)의 한마디가 밥그릇위를 스쳐간다.약산은 『화상의 높으신 뜻이 무엇이냐』는 백암(柏岩)의 질문에 자신의 일상적 실존을 조개가 입 을 벌려 속을 훤히 드러내듯 이처럼 내보였다고 한다.
아니 벌거벗은 나무에 불어온 금빛 가을바람(體露金風)이 뼛속까지 시원케해주는 기분이다.『나무가 시들고 잎(번뇌망상)이 떨어질때 무슨일이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던 옛 운문선사의 「체로금풍」이 천년을 지난 지금에도 시원 하기만 하다. ***점 심후 돌아본 조전(祖殿)은 84년 일본 탈사(脫紗)기법으로 복원한 운문선사상을 모셨다.본래는 진신상(일명 육신상)이었다는데 문혁때 파괴돼 없어졌단다.
별도의 조사전에는 중앙에 달마,좌우에 도선(道宣)과 백장(百丈)선사상이 봉안돼 있다.중국 선불교 특징의 하나는 부처와 조사를 동격시,또는 조사 우위로 받들며 불상형식의 조사상을 만들어 사찰내 조사전에 봉안하고 예배한다는 점이다.이 는 인도불교와는 전혀 다른 동아시아 선종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선당은 청규시행에 사용하는 향판(香板)과 경책(警策)이여법하게 세워져있고 방장석은 별도로 구분되는 장식을 해놓았다.
운문종풍을 상징하는 선당안의 종에 매단 나무판(鍾板)은 8각형의 마름모형이다.조석으로 매일 40분씩 전 대중이 좌 향(坐香)을 하고 겨울철에는 10기(70일)의 참선을 한다.
농선병행(農禪倂行)도 옛 선문의 전통대로 철저히 실시,9㏊의사찰 전답을 승려들의 보청(普請:공동작업)으로 직접 경작한다.
***메 모 ▶위치:광동성 유원 요족자치현 운문향▶교통:소관시 서북50㎞,현소재지서 6㎞▶유적:운문선사탑비.허운대사 묘탑등 글 이은윤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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