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 가득한 영남 선비들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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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이황이 손자에게 보낸 편지. [소수박물관 제공]

 ‘내가 전의 일로 물의가 그치지 않아 처벌을 기다리다가 뜻밖에 또 소명이 내렸으니 황공하고 놀라워 까닭을 알지 못하겠구나.’(이황이 손자 안도에게 보낸 편지)

1567년 67세의 이황은 명종의 국상 절차가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비방을 듣는다. 그는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조정은 그가 지근거리에서 임금에게 조언하기를 종용했다. 이황은 손자 안도에게 편지를 보내 이런 난처한 속내를 드러낸다.

‘학생 몇명이 이 책을 읽으려고 자네를 기다리느라 멈추고 있다네.’(조목이 제자 김택룡에게 보낸 편지)

소수박물관이 발간한 ‘김항회 기증유물 도록-영남 선비들의 유묵, 첩(帖)이 되다’의 표지.

이황의 제자 조목은 봉화현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런 중에도 자신을 찾아 온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제자 김택룡과 함께 옛 책을 읽고 싶어 제자가 오기를 몹시 희망했다.

‘저는 지금 울산에서 바다 위에 뜬 달과 산중의 사슴과 친구가 되었으니 지난날 고생한 세상사를 추억하면 아련히 꿈결 같습니다.’(백양사 요양 시절 김창숙의 편지)

1927년 일제에 격렬히 저항한 김창숙은 일경에 체포돼 고문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 백양사에서 몸을 추슬렀다. 그는 백양사에서 바다 위에 뜬 달과 사슴을 보며 지난 날을 회상한다. 전시 중인 영남 유학자의 편지 중 일부다.

영주 소수박물관은 조선 중기부터 구한말 사이 영남 유학자의 편지와 시 120점을 번역한 뒤 지난 1일부터 내년 8월까지 전시 중이다. 김일손·이황·조목·류성룡·김성일·장현광·정구·정경세 등의 유묵이다. 편지 내용은 안부부터 과거시험·출산·질병·약처방·조문 등 선비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이들 유묵은 대구화랑 김항회 대표가 영주시에 기증한 4000여 점의 간찰(편지)과 시 등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송의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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