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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11. 6·25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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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긴 후 나는 연락장교 시험에 합격, 군인의 길을 가게 됐다.

어머니가 있는 대구로 가기 위해 서울역으로 갔다. 열차가 하나 서 있었는데 피란민이 열차 지붕에까지 새까맣게 몰려있었다. 열차가 안 간다는 승무원의 말을 순진하게 믿고 돌아왔다가 꼼짝없이 서울에 갇혔다. 뉴스를 방송하는 곳은 KBS 라디오뿐이었는데 방송국 사람들이 녹음기만 틀어놓고 다 도망간 뒤였다. 오후가 되니 포탄 소리가 더 크게 들렸고, 다음날 새벽에는 인민군이 시내로 들어왔다.

나는 친구인 변응원의 집에 함께 있었다. 하루는 동네 사람 모두 나오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가 보니 가마니로 덮은 시체를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울고 있었다. 인민군이 세 사람을 즉결 처분했다고 한다. 말로만 듣던 인민재판이었다.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인민군 10여 명이 집에 들이닥쳤다. 우리를 국군 패잔병으로 본 것이다. 그 중 한 명이 권총에 총알을 장전하더니 나한테 베란다로 나오라고 했다. 나가면 방아쇠를 당길 것 같았다. 안 나가고 버텼다. 그때 한태원이라는 서울대 법대생이 변응원의 집에 들렀다가 끌려왔다. 그가 좌익운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한태원이 자기가 서울대 법대 좌익 책임자라고 설명한 덕분에 나는 살았다.

불안해진 나는 과천 우면산 기슭에 있는 이모 집으로 피신했다. 2개월 동안 이모 집에서 밥을 먹고, 낮에는 뒷산에 숨고 하며 지냈다. 우면산 기슭에 이중우라는 중학 동창이 살고 있었다. 그의 친구 한 명과 셋이서 논두렁에서 자기도 하고, 청계산에 올라가 도토리를 따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우면산으로 피란 온 사람 중에 한통숙 상공부 차관도 있었다.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9월 25일 무렵 새벽에 전차 소리와 미군 병사들의 영어 대화가 들려왔다.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에 바깥으로 나왔다가 그만 후퇴하던 인민군 패잔병에게 걸렸다. “너는 뭐야”하고 묻기에 엉겁결에 “교원이요”하고 대답했다. 나를 한참 노려보더니 그냥 갔다. 마침 연희대 교복인 감청색 상의를 입고 있었는데 그게 교원 복장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정말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겼다.

서울이 수복되고 국군과 유엔군은 북상을 계속 했다. 병력 보강이 필요했기 때문에 서울에서 살아남은 젊은이들은 전부 군대에 가야 했다. 징병 소집령이 집집마다 나왔는데 장교후보생 모집도 있었다. 국군과 미군의 공조가 절대적일 때였으므로 마침 육군본부 국제연합 연락장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나붙었다. 영어를 잘하니까 이건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데 응시 자격이 21세 이상이었다. 내 나이 19세. 나이를 속여야 했다. 연희대 학도호국단 사무실에 가서 2학년 재학증명서를 뗀 뒤 4학년으로 고치고 나이도 21세로 올렸다. 그리고 함께 피란 생활을 했던 한통숙 차관이 신원보증서를 써준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다. 공문서 위조였지만 전쟁 통에는 다 넘어갔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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