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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북한 김영희 칼럼

북한의 뒷문을 두드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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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울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부산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해상 항로는 700㎞. 시베리아의 국경도시 하산에서 두만강 너머 북한 쪽을 건너다 보면 나지막한 산 저쪽이 나진·선봉이다. 바이칼호가 옆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 아무르강을 따라 하바롭스크에 이르는 시베리아 벌판에는 조선의 항일 빨치산 대장들의 숨결이 살아 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태어났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은 일제시대 항일투사들의 활동 무대요, 은신처였다. 브랴트 자치공화국의 치타는 이광수가 조선어 신문을 만들던 곳이다.

지리·역사·문화·정서적으로 이렇게 가까운 시베리아가 우리에게 먼 곳으로 남았던 것은 북한과 소련이 오랜 금단의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자원의 보고로 등장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러시아는 에너지를 팔아야 하고 한국은 러시아의 에너지를 사야 한다. 이런 경제적 이해의 접점에서 두 나라는 북한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한 천연가스 공급에 합의를 봤다.

가스(Gas)는 말 그대로 기체다. 수입가스는 액체로 바꾸어(Liquidize) 배에 싣고 온다. 이것이 LNG다. 그걸 기체로 되돌려(Gasify) 가정과 공장으로 보낸다. 한국과 러시아가 합의한 것은 시베리아에서 한국까지 파이프라인을 연결하여 가스를 액화(液化)하지 않은 가스 상태 그대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파이프라인을 통해 오는 기체 상태의 가스가 PNG다. 가격은 LNG의 70% 수준이다.

시베리아에서 가스를 수입하는 것은 두 가지 경제적 이점이 있다. 하나는 수송비를 포함한 원가가 싼 것이고, 두 번째는 거리가 가까워 시간이 단축된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북한 설득에 성공하면 한국은 2015년부터 30년간 북한을 통과하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1년에 750만t의 천연가스를 수입하게 된다. 2015년 한국의 예상 가스 소비량의 20%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그러나 시베리아(Siberia)~북한(North Korea)~남한(South Korea)을 연결하는 SNS 파이프라인은 경제적 의미 못지않게 정치적 의미가 크다.

파이프라인 설치는 초대형 공사다. 북한이 노동력 공급으로 얻을 이익이 엄청나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에 따르면 북한은 파이프라인 통과료로 1년에 1억5000만 달러를 받게 된다. 지금 당장은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핵문제가 교착상태에 빠진 데다 김정일 이후 북한 정치사정의 불확실성으로 북한이 파이프라인 설치에 동의하기까지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북한이 끝까지 “노”라고 말하기에는 파이프라인에서 예상되는 연간 몇 억 달러의 유혹이 너무 클 것이다. 북한의 반대로 파이프라인 설치가 실현되지 않으면 가스를 배로 실어온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북한을 통과하는 가스 파이프라인은 북한의 개혁·개방을 촉진할 정치적인 파이프라인이다. 한국과 러시아가 힘을 모아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의미 있는 프로젝트다.

북한을 지나는 가스 파이프라인 설치는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에서 그 국력과 지정학적 위치에 합당한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한반도 문제의 포괄적인 해결과 동북아 평화·안보 체제를 만드는 데도 큰 기여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러시아는 6자회담을 포함한 한반도 문제 논의에서 항상 미·중·일에 밀려 제2의 바이올리니스트(Second fiddler) 역할에 머물러 왔다.

국방대학원 한용섭 교수는 러시아가 9·19 공동성명으로 출범한 동북아 평화·안보에 관한 실무그룹의 의장국이 된 데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국가이면서 아시아 국가인 러시아는 지금까지는 대외정책의 우선순위를 유럽에 두어 왔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베리아 개발이 시작되면 동북아가 러시아 대외정책의 새로운 지평으로 떠오르고, 한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관심도 차원을 달리할 것이다.

러시아의 소극적 자세는 상대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역할을 너무 키웠다. 러시아가 본격적인 시베리아 개발에 나서고, 한반도 종단철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연결되고, 한·러·일이 삼각 항로로 연결되면 시베리아는 잘 된 성형수술을 받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고, 우리의 동해안은 동북아 해상 물류의 허브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북한 설득이 전제되면 이루지 못할 꿈도 아니다. 인내심을 갖고 북한의 문을 두드려야 한다. 앞문이 안 열리면 뒷문을 두드려야 한다. 이런 비전 제시가 이 대통령 러시아 방문의 장기적 성과다.

김영희 국제전문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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