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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집 파는 학교 앞, 동심은 잔혹·엽기에 물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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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호 12면

초등학교 부근 문구점에서 팔리고 있는 담뱃갑 크기의 괴담집들. 같은 내용물을 표지만 바꾸거나 내용과 상관없는 표지를 붙인 경우가 많다. 신인섭 기자

“반지를 잃어버린 엄마는 딸의 멱살을 잡고 반지를 내놓으라고 다그친다. 엄마의 반지를 훔친 딸은 집에서 일하는 노파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엄마가 노파를 추궁하자 노파는 며칠 뒤 종적을 감춘다. 엄마는 딸의 방에서 반쪽만 남은 딸의 시체를 발견하는데, 알고 보니 노파가 딸을 먹어 버린 것이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초등학교 괴담’의 유통망

최근 초등학생 사이에 유행하는 괴담집에 실린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렇게 살인과 보복 등 끔찍하고 엽기적인 내용을 담은 괴담집의 유통을 근절하기 위해 각 시·도교육청에 협조 공문을 보내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밤만 되면 학교 운동장에서 싸움을 하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빨간 종이 줄까, 파란 종이 줄까”라고 물어보는 화장실 귀신, 거꾸로 선 채 머리로 ‘통통’ 걸어 다니며 친구를 찾아 헤매는 ‘통통귀신’… 부모 세대에서 자녀 세대로 이어지는 ‘학교괴담’은 성인들에게도 그리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초등학생 사이에 유행하는 괴담집은 잔혹성과 비윤리성이 이미 도를 넘었다는 평가다. 이러한 괴담집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걸까.
 
‘빨간 마스크’는 10년 주기 출몰
24일 기자는 서울의 몇몇 초등학교 부근 문구점과 동대문 문구 도매시장을 방문했다. 일명 ‘공포집’이라고 불리는 괴담집들이 ‘죽음을 부르는 노트 데스수첩’ ‘광우병의 진실’ ‘무한공포특급’ ‘1박2일팀 공포체험을 하다’ 등 인기 만화나 TV프로그램 이름을 제목으로 달고 권당 500원에 팔리고 있었다. 서울 서대문구 한 초등학교 부근의 문구점 주인 A씨는 “올해 초 들여온 20개짜리 공포집 세 상자를 모두 팔았다”며 “물건은 보통 동대문 문구 도매시장에서 떼 온다”고 전했다. 문구점에 있던 한 학생에게 물었더니 “괴담집을 본 뒤 잠을 제대로 못 잔 적이 있다”고 답했다.

그러나 현행법상 이런 괴담집을 심의하고 단속할 근거는 전혀 없다. 문구업자가 개별적으로 기획·제작한 후 인쇄소에서 찍어낸 괴담집들은 문구류로 분류되고 있다. 정식 출판물이 아니어서 청소년보호법 등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괴담집이 이미 10년 이상 판매돼 왔는데도 교육당국이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하는 이유다. 이 때문에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 유지향씨는 “아이들에게 ‘좋은 책’ 목록을 제시하고 해당 책들을 읽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괴담집을 멀리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괴담집들은 동대문과 영등포 일대의 문구 도매상으로 넘겨져 전국의 학교 문구점으로 유통된다. 올해 10종 이상의 괴담집을 찍어낸 한 문구 제작업자는 “주위에서 떠도는 이야기나 인터넷 카페·블로그 등에 올라온 것들을 직원들이 수집해 편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 주위에서 괴담이 사회 문제화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벌어졌던 ‘홍콩할매귀신’ 소동이 대표적 경우다. 당시 홍콩에서 온 할머니 귀신이 어린이들을 납치해 해친다는 소문이 서울 강남 지역에 돌았다. 각 초등학교에서는 등교를 꺼리는 학생들에게 괴소문에 동요되지 말도록 긴급 지도에 나서야 했다.

80년대 초반부터 주기적으로 유행해 온 ‘빨간 마스크’ 괴담도 마찬가지다. 입이 찢어진 처녀가 빨간 마스크를 쓰고 돌아다니며 “내가 예쁘냐”는 질문에 아니라고 대답하는 학생들의 입을 찢어 버린다는 소문이었다. 78년 일본 기후현에서 시작된 이 소문은 79년 일본 전역으로 확산된 뒤 83년께 한국에 상륙한 것으로 알려졌다. 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 아동 납치·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등 사회가 불안해질 때마다 다시 유행하기도 했다.

불면증·대인기피증 시달리기도
이 괴담을 연구한 일본 학자들은 70년대 후반 자녀를 학원에 보낼 수 없었던 학부모들이 의도적으로 유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회적 불안을 부추겨 여유 있는 집안의 자녀들까지 학원에 다니지 못하게 만들자는 의도가 투영된 것이라는 설명이다. ‘홍콩할매귀신’ 괴담도 유괴나 인신매매 등 강력범죄가 자주 일어나자 학부모들이 자녀를 일찍 귀가시키기 위해 소문 확산을 부추겼다는 분석도 있다.

초등학생이 유독 괴담에 민감한 이유는 뭘까. 심리학자들은 이 연령대 아이들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기 시작하는 정신발달 단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소아정신과 전문의인 서천석 행복한아이연구소장은 “부모·친구와의 갈등이 싹트는 이 시기 아이들은 그 감정을 해소하고 싶어한다”며 “억눌린 불편한 감정 때문에 상상력과 호기심이 더 자극된다”고 설명했다. 서 소장은 “예민한 아동의 경우 잔혹한 괴담을 접한 뒤 불면증이나 대인기피증에 시달릴 수 있다”며 “부모가 자녀에게 괴담집이 비현실적이란 점을 이해시키는 등 적극적 지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학계에 따르면 학교에서 전래되고 있는 ‘학교괴담’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된 것이다. 화장실 귀신은 재래식 화장실의 변기 밑에서 손을 내밀어 엉덩이를 쓰다듬는다는 물의 요괴 ‘갓파(河童)’에서 비롯된 것이고, 학교 부지가 원래 공동묘지였다는 소문도 마을 중앙에 공동묘지를 뒀던 일본의 전통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학교괴담을 민속학적으로 분석한 책 『도시, 학교, 괴담』을 쓴 중앙대 김종대(민속학) 교수는 “한국의 학교괴담은 대부분 신식 학교 체제가 도입된 일제시대에 수입돼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결합하는 토착화 과정을 거쳤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도 귀신을 불러내는 주술인 ‘분신사바’가 고등학생 사이에 크게 유행하고, ‘학교괴담’이라는 제목의 일본 애니메이션이 초등학생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얻는 등 괴담문화 수입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심리학자는 학교괴담의 특수한 기능에 주목하기도 한다. 학교괴담을 통해 학교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학생이 불안감과 공포를 공유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성적이 주는 압박감은 2등에게 죽임 당한 1등이 ‘통통귀신’이 되어 2등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로, 부모에 대한 반항심은 귀신으로 변한 엄마 이야기로 변환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괴담집과 인터넷·대중매체·게임 등을 통해 훨씬 잔인하고 엽기적으로 각색된다는 점이다.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괴담을 만들어 내고 유통시키는 어른들의 상혼에 아이들의 상상력과 정서가 멍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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