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국제 금융시장 진출 지금이 기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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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린 ‘미국 금융위기와 한국의 기회’ 토론회에서 에반 램스타드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서울지국장이 최근 미국 금융 위기를 보도한 자사 신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그 옆은 최명주 GK 파트너스 대표. [최승식기자]

 “항공기 사고가 났다고 항공산업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김기환 서울파이낸셜포럼 회장은 최근의 ‘투자은행 종말론’에 대해 이같이 일갈했다. 이와 함께 참석자들은 규제 완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분위기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문제는 무턱대고 규제를 강화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리스크 관리를 철저히 할 수 있느냐라는 얘기다. 다음은 참석자들의 주요 발언.

◆“리스크 관리 부재가 원인”

▶제프리 존스 미래의동반자 재단 이사장=“한국의 신용카드 대란 때와 같은 상황이다. 그때는 숨만 쉬면 카드를 내줬다. 미국에서는 명의만 있으면 대출을 받아 집을 샀다. 캘리포니아의 부모님 이웃이 경찰관인데 50만 달러짜리 집에 살았다. 경찰관 월급으로는 어림없는 일이었지만 은행에서는 대출을 해줬다. 당시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집을 샀다. 결국 금리가 오르면서 집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과 모기지 회사들이 개인의 신용을 더 이상 정확히 평가하지 못하면서 위기가 벌어진 것이다.”

▶ 최운열 서강대 부총장=“그린스펀 시대의 저금리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금리가 낮으니 대출 수요가 커지고 자산 버블이 생겼다. 첨단 금융공학은 이 버블을 확대재생산하는 역할을 했다. 금융 당국의 감독 기능도 없었다. 특히 장외 파생상품에 대해서는 회계원칙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부실 규모조차 파악이 안 됐다. 내부 통제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에 문제가 생긴 투자은행의 공통점은 영업부서에서 리스크 관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지 못했다.”

◆“장기 불황으론 안 갈 듯”

▶최명주 GK 파트너스 대표=“위기가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과잉 유동성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이미 금융 부문의 위기가 실물 부문으로 넘어가 있다. 미국에서는 현재 월마트 외에 제대로 실적을 내는 회사가 없다는 말도 나온다. 미국 경기의 침체는 수출 감소로 이어져 우리도 타격을 받을 수 있다. 미국 정부가 대규모 구제자금을 투입하고 나섰지만 중요한 것은 규모보다 시장의 신뢰를 얼마나 회복할 수 있는가다.”

▶김기환 회장=“미국은 위기 때 상당히 정책결정이 단호하고 빨라진다. 미국 정책 입안자들은 20세기 초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신속히 대응하지 못하는 바람에 대공황을 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대규모 구제자금 투입으로 물가 불안 등 부작용은 있겠지만 일본과 같은 장기 불황으로 갈 우려는 없다고 본다.”

◆“투자은행 종말론은 섣부른 주장”

▶리처드 웨커 외환은행장=“투자은행의 종언론에 동의할 수 없다. 전체 금융시스템에서 은행이 가장 보수적이라면 헤지펀드는 가장 역동적이다. 그 중간이 투자은행이다. 투자은행은 상업은행이 들어갈 수 없는, 보다 위험하면서도 창조적인 시장을 개척해 왔다. 자본시장에서 위험도가 큰 자본을 원활하게 조달하고 배분하는 기능은 앞으로도 필요하다. 상업은행이 그런 역할을 떠맡지는 못한다.”

▶김수룡 도이체 방크 한국 회장=“상업은행(CB)과 투자은행(IB) 양쪽에서 일해봤지만 요즘은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추는 게 대세다. JP 모건 체이스나 도이체방크 안에도 투자은행 기능을 하는 부서가 자리 잡고 있다. 투자은행과 상업은행 기능을 모두 갖춘 CIB가 새로운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금융 규제 완화 지속해야”

▶황건호 증권업협회장=“금융 규제 완화의 움직임이 시작됐는데 이번 사태를 금융규제 완화의 기조를 흩트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내년에 자본시장통합법이 시행될 예정인데 이는 규제 완화의 상징이다. 이를 기점으로 은행과 자본시장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뤄 나가야 한다. 사실 미국이 과도하게 대출을 증권화해 문제가 됐다면 우리는 너무 증권화하지 않아 문제다.”

▶리처드 웨커=“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는 아시아 쪽이 피해가 컸는데 이번에는 미국이 타격을 받았다. 아시아의 경우 외환위기의 경험 때문에 그만큼 조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일본 금융사들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일본 모델이 맞다고 판단하는 것은 안이하다고 생각한다. 규제가 없어 부실이 커졌다는 주장에도 무조건 동의할 수 없다. 대규모 구제자금이 투입된 국책 모기지 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은 스스로 가장 강력한 규제를 시행하던 곳이다. 정부의 정책적인 도움이 오히려 문제를 키운 측면도 있다.”

◆“한국에는 기회”

▶황건호=“이번 사태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었다. 하나는 규제 완화로 가는 상황에서 미국이 겪은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리스크 관리에 보다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에 문제가 된 최고경영자들(CEO)의 단기 실적주의의 폐해는 한국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외환위기 이후 금융의 기업성을 강조해 왔지만 이번 기회에 공공성을 적절하게 살리는 문제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 금융 전문인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는 교훈도 얻었다. 일본 금융사들이 신속하게 투자은행 인수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미리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준비하는 자에게 기회도 온다.”

▶양수길 국가경영전략연구원장=“국제 금융시장에 진출하려면 지금이 큰 기회다. 문제는 금융개혁을 늦추자는 등 퇴행적인 모습이 보인다는 것이다. 외환은행 인수 문제에 2년이란 시간을 끌면서 결국 HSBC가 포기 선언을 했다. 금융 허브를 추진하면서도 금융선진화와는 갈수록 멀어지는 것이다.”

▶김수룡=“JP 모건 체이스 등 선두 금융사들을 보면 끊임없는 합병을 통해 성장해 왔다. 기회가 있을 때 놓쳐서는 안 된다.“

정리=조민근 기자, 사진=최승식기자



램스타드 AWSJ 서울지국장

투자은행 이어 헤지펀드 타격 … 한국에도 영향

 “결국 터질게 터졌다. 이제 월스트리트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될 것이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에반 램스타드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 서울지국장이 모두발제를 맡았다. 이 자리에서 그는 월스트리트에서 벌어진 긴박한 상황과 이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을 함께 지켜본 소감을 털어놨다.

그는 “금융사들이 무차별로 대출해주고 소비자들은 이 돈으로 소비를 늘렸는데, 이런 상황이 지속될 수 없다는 점은 오래 전부터 전문가들이 경고해 왔다” 며 “투자은행들도 더 이상 과거의 영업 행태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식 금융시스템의 종말론’ 등과는 거리를 뒀다. 그는 “지난 2주간 시장은 오히려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했고, 부실 금융사에 대한 시장의 냉정한 평가가 모든 변화를 촉발시켰다”고 강조했다.

그는“미국은 당분간 국내 경제를 살리는 데 주력할 것”이라면서 “그 과정에서 한국의 산업은행 형태의 국책 금융기관이 나타나고 인천공항 건설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향후 전망과 관련해 그는 위기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부동산에 이어 자동차 대출 등도 줄줄이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는 “월스트리트에서는 투자은행에 이어 헤지펀드가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도 불가피하게 영향을 받을 것이란 지적이다. 특히 전 세계적인 신용경색이 예상되므로 차입금이 많은 중소기업은 더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지나친 ‘안전 제일주의’도 도움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특히 최근 산업은행의 리먼브러더스 인수 시도와 관련해선 다소 아쉽다는 반응이다. 그는 “일본이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반면 한국은 조심하자는 분위기인 것 같다”며 “산업은행 총재가 국회에서 공격받는 모습을 보면서 정치적 상황이 한국이 기회를 잡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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