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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의 교훈, 벌써 잊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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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2000년 12월 초 미국 뉴욕을 취재한 적이 있다. 본지가 2001년 신년 기획으로 10회에 걸쳐 연재한 ‘선진금융, 이 정도는 돼야’ 시리즈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월가 투자은행(IB)의 기세는 등등했다. 1990년대 말 아시아를 덮친 외환위기는 IB를 위한 독무대였다. 헐값에 쏟아져 나온 기업·금융회사를 사고팔거나 파생상품이라는 신무기를 팔아 천문학적인 돈을 긁어 모았다.

외환위기를 겪으며 월가의 힘을 실감한 한국 금융회사로선 월가 IB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IB를 취재하면서도 내내 두 가지 감정이 엇갈렸다. 콧대 높은 그들의 태도에 입맛은 썼다. 그러면서도 세계 금융가를 휘젓는 월가 금융제국의 위세에 부러움을 넘어 경외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불과 8년 만에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됐다. 이름만 들어도 주눅들던 월가의 IB가 줄줄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와 중동의 전주(錢主)에게 목을 맸다. 리먼 브러더스를 놓고 인수협상을 벌인 산업은행의 말 한마디에 월가가 웃고 울었다. 8년 전 뉴욕에선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월가의 참새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든 우리로선 통쾌한 기분이 들 만했다.

감정을 떠나 냉정히 손익을 따져 봐도 그렇다. 국내 금융회사는 돈으로 따지자면 수천만 달러어치 광고효과를 봤다. ‘갑’의 입장에서 세계 5대 IB의 장부를 들춰 보는 기회를 얻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안방까지 들어가 재산은 얼마나 되고, 값나가는 패물은 뭐가 있는지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거기서 얻은 정보만 해도 값으로 따지기 어렵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요즘 한국 정부나 산업은행의 행보를 보면 자꾸 불길한 예감이 든다. 상전벽해의 역전극이 벌어진 게 우리가 잘해서 그런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리먼과의 인수협상이 깨진 직후 “(리먼이) 우리 말을 들었더라면 파산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랬을까? 리먼보다 사정이 훨씬 나았다는 AIG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로부터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받았으나 아직 중환자실 신세를 지고 있다. 산업은행이 어느 틈에 FRB를 능가하는 내공을 쌓았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기로는 정부도 뒤지지 않는다. ‘9월 위기설’이 퍼지자 기획재정부는 황급히 뉴욕 월가의 문을 두드렸다. 정부라도 나서서 채권 10억 달러어치를 팔아오겠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위기설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자 금세 태도를 바꿨다. “금리가 너무 높다”며 다 차려 놓은 밥상을 걷어찼다. 그리고 나서 딱 이틀 뒤 리먼이 파산 신청을 하고, 메릴린치가 은행에 팔려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외환시장은 물론이고 채권시장과 주식시장 곳곳에서 곡소리가 났다.

세계 1위 은행이 된 HSBC가 외환은행 인수를 포기하도록 몰아간 국내 상황은 더 안타깝다. HSBC의 외환은행 인수는 ‘먹튀’ 논란을 빚은 론스타 재판과는 애초부터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금융위원회는 여론의 눈치를 살피느라 인수 승인 신청서만 만지작거렸다. 정부가 나가서 투자자를 모셔와도 시원찮을 판에 돈 싸 들고 온 우량 고객을 쫓아버렸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하기야 증시가 죽 쑤고 있는 올해 8곳이나 되는 증권사 신설을 허용한 금융위니 그 안목을 탓해 무엇하랴.

지금까지 우리가 좀 우쭐거릴 수 있었던 건 우리가 잘해서가 아니다. 상대방이 자책골을 넣은 덕을 본 거다. 초반 분위기에 도취해 상황을 오판했다간 큰코다친다. 경기는 지금부터다. 미국을 덮친 위기를 보며 강 건너 불구경을 할 때가 아니다.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은 괜찮다’고 큰소리치다가 외환위기를 겪은 아픔을 벌써 잊었나.

정경민 경제부문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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