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대책반장' 김석동 "달러, 다 부을 각오로 맞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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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경제가 어수선하다. 미국 부동산 하락에서 시작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세계 금융의 본산인 뉴욕 월가를 공황 상태에 빠뜨렸다. 세계를 주름잡던 투자은행과 보험사들이 파산의 쓴 잔을 들이키거나 구제금융ㆍ합병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한국도 몸살을 앓고 있다. 환율과 주가, 금리가 하루가 멀다하고 널뛰기를 반복한다. 위기라는 단어가 실감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영원한 대책반장’이란 별명처럼 한국 경제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탈출구를 찾는 역할을 도맡아왔던 김석동 전 재정경제부 차관을 중앙SUNDAY가 찾아가 봤다.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턱밑까지 차오른 위기에 퍼뜩 ‘영원한 대책반장’으로 통하는 김석동 전 재정경제부 차관이 떠올랐다. 지난해 가을 사석에서 “내년에 제2의 외환위기가 올 수 있다”고 경고장을 날린 인물. 그는 일찌감치 위기의 쓰나미를 예감하고 있었다. 위기의 끝은 대체 어디일까. 탈출구는 없을까. 그는 마침 반년간의 휴식을 마치고 지난달 10일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로 취임했다. 시장은 위기 때마다 그를 전면에 불러냈었다. “정책을 수행하는 선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는 그를 서울 중구 순화동의 사무실로 다짜고짜 찾아가 차 한잔을 청했다.

“암초는 폭파했어야 했다”
“내가 겪어 본 것 중 최악의 사건이다.” 그는 대뜸 겁부터 줬다. 외환위기며 카드 사태까지 산전수전 다 치른 김 대표도 미국발 금융위기의 파괴력에 기겁할 정도였다. 그렇게 심각하냐고 물었다. “과거의 위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금융위기, 실물경제 침체, 원자재값 상승이 트리플로 덮쳐 왔기 때문이다.” 그는 “그린스펀이 ‘100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라고 한 말에 공감한다”고 했다.

“본질부터 짚어 보자. 그래야 해법도 나오니까….” 김 대표는 “서브프라임 사태가 터진 지난해 8월 ‘대형 사건’이란 감을 잡았다”고 했다. 재경부 차관으로 금융정책을 총괄하던 그의 지뢰 탐지기엔 대체 뭐가 걸려들었던 걸까. “주택담보대출과 여기서 새끼를 친 파생상품(MBS)의 구조를 보고 ‘큰일 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MBS의 밑바탕인 담보대출이 30년 만기에서 첫 2년을 제외한 28년이 변동금리여서 집값이 떨어지고 금리가 오르면 직격탄을 맞을 구조임을 직감했다고 했다. “MBS는 30년치 이자를 다 받았다는 전제로 만들어졌는데, 이에 기초한 다른 파생상품이 무제한 새끼를 쳤다. 모두 주택 거품 붕괴의 제물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엘리트들이 왜 미리 구급차를 준비하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김 대표는 ‘암초론’을 꺼내 들었다. “항해 중에 서브프라임이라는 암초가 나타났다는 걸 그들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돌을 폭파하는 정공법 대신 금리인하 처방을 택했다.

돈의 충분한 공급으로 수위를 높여 배를 우회시키려 했다.” 그러나 벤 버냉키 FRB 의장이 자인한 것처럼 이 방법은 한계에 부닥쳤다. 더 큰 암초들이 항로 앞에 줄줄이 대기 중인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는 “이번 위기의 파장은 알트에이와 프라임 같은 우량 주택대출은 물론 중소기업·자동차대출, 카드론까지 번질 수 있다”고 했다.

“한국 경제, 대협곡 앞에 섰다”
김 대표는 “지금은 대공황에 버금갈 세계사적 전환기”라고 진단했다. 유례 없는 장기 호황을 만끽한 뒤 금융시장이 붕괴하고 불씨가 실물 쪽으로 옮겨 붙는 꼴이 꼭 닮았다고 했다. 그에게 한국도 큰 고통을 겪을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경기순환 정도의 계곡이 아니다. 큰 협곡을 지난다고 보면 된다. 아찔한 상황이다”는 답이 돌아왔다.

“하지만 지레 겁먹을 일이 아니며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길은 분명히 보인다”고 몇 번을 강조했다. “다행인 건 위기가 밖에서 터진 일에 뿌리를 뒀다는 점이다. 몸 외부를 몽둥이로 맞으면 어디가 아픈지 금방 확인할 수 있고 처방도 정확히 낼 수 있다.” 그는 “우리 몸에 속병이 났지만, 도대체 어디가 문제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던 외환위기 때와 비교해 훨씬 대응하기 쉬운 국면”이라고 진단했다. 위기의 파장을 예측하고, 정책적으로 방어술을 펼치는 게 가능하다는 얘기였다.

김 대표는 “아킬레스건은 외환시장”이라고 했다. “외국인이 뇌관이다. 부실 늪에 빠진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제 곳간 채워 넣기 바쁜 상태에서 외국인 돈은 계속 빠져나갈 공산이 크고, 단기 외채도 부담이다.” 그는 세 방향의 처방을 제시했다. 환율을 적당한 선에서 시장에 맡겨 상승을 용인하되 외환보유액을 활용해 부담스러운 수준으로 뛰는 일을 막아야 하며, 필요하다면 금리인상 처방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시장에 분명한 메시지를 주는 게 환율 안정의 첩경”이라며 “외환보유액이 제로(0)까지 가더라도 쓸 때는 과감하게 쓰면서 환율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특유의 위기관리 철학을 읽어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울러 “기업과 근로자를 포함한 국민에게 솔직하게 ‘고통을 분담하자’고 부탁하고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최근 정부의 선후배 관료들을 만나본 결과 상황을 직시하고 있었다”며 “잘 대처할 것으로 믿는다”고 했다.

관치의 타이밍
외환위기 때 재정경제원 김석동 외화자금과장은 위기의 최전선에서 외환 수급을 조절하고 환율을 방어하는 일을 맡았다. 그에겐 금융 및 부동산 시장에 일이 터질라치면 긴급대책반장 직이 주어졌다. 그가 대책반장을 맡으면 호텔 방부터 잡았다. 사무실 컴퓨터를 통째로 옮겨와 먹고 자며 대책을 궁리했다.

‘열심히 한다’는 평을 듣게 됐지만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관치의 화신’이란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에게 당시의 심경을 물었다. “남들 생각처럼 관치를 즐긴 게 아니다. 대형 사건들이 터져 대책반장을 맡게 되면 정말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은 마음부터 들었다.”

그는 나름의 관치 철학을 털어놨다. “시스템 붕괴를 막는 건 시장이 아니라 정부의 몫”이라고 했다. “평소엔 베일 뒤에서 보이지 않는 ‘빅 브러더’로 남아야 한다. 그러나 위기 때엔 단호하면서도 확실하게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 그는 “위기 때 이해관계가 뒤얽힌 시장 참여자들에게 일을 맡겨 둬선 해결하기 어렵다. 그게 국민의 혈세를 아끼는 길”이라고 했다.

바이칼호에서 깨친 희망
김 대표는 올 초 과천을 떠난 뒤 처음으로 휴식다운 휴식을 취해 봤다고 말했다. 관료 생활 동안 그 흔한 해외 근무와 연수도 다녀오지 못한 그였다. 그는 요즘 한국 고대사 연구에 푹 빠져 있다고 했다. “쉬면서 상고사를 파고 또 팠다. 낯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한민족의 유목민 기질이야말로 ‘번영의 DNA’라고 생각했다.” 기마민족의 원류를 탐구하려고 얼마 전 바이칼호까지 다녀온 그는 “시베리아와 몽골을 거쳐 한반도까지 이어진 기마민족의 역동성이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그가 지금의 위기 틈바구니 속에서 기회를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번 위기는 미국에 국한되지 않는다. 많은 나라가 심한 타격을 받고, 적잖은 경쟁국이 쓰러질 것이다. 여기서 버틴다면 한국에는 강국으로 도약하는 축복의 시간이 열릴 것이다.” 김 대표는 “더구나 한국은 외환위기라는 예방주사를 10년 전에 맞은 나라가 아닌가. 그동안 체력을 많이 다져 놓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로펌인 김앤장에 갈 생각도 했었다고 한다. 갈고닦은 실력을 시장과 나누려 했지만 공직자윤리법에 걸려 금융회사나 기업으로 가는 길이 원천 봉쇄돼 있었다. 그러나 농협연구소의 영입 제의를 받고 “이곳이라면 좋다”고 생각해 선뜻 응했다고 했다. “만족한다. 원래 어릴 때부터 농자(農者)를 중히 여기라는 소릴 듣고 자랐다. 항상 기본이 중요하다. 모처럼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농협 개혁 작업에 초석을 놓고 싶다.” 나랏일을 다시 하게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그는 손사래로 답을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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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김석동(55) 농협경제연구소 대표는 금융실명제(93년)·부동산실명제(95년)를 비롯해 외환위기(97년)와 카드 사태(2003년) 같은 굵직한 현안이 터질 때마다 정부 대책반을 이끌었다. 부산 출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와 행시 23회로 관가에 들어왔다.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금감위 부위원장 등을 거쳐 재경부 차관을 끝으로 과천을 떠났다.

나현철·김준술 기자 tigera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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