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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회사 사가라” … 세계 금융시장 큰손들 ‘굴욕의 9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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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 투자은행 중 하나가 또 간판을 내릴 위기에 처했다. 17일(현지시간) 뉴욕 타임스스퀘어의 모건스탠리 본사 대형 간판에 파란 불이 들어와 있다. 뉴욕 타임스는 이 회사가 와코비아 은행과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뉴욕 AP=연합뉴스]

초대형 금융회사들이 줄줄이 팔리고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로 주가가 폭락한 데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빚이 쌓이면서다. 반면 평소 위험을 잘 관리해 온 회사들은 경쟁사를 ‘헐값’에 사들여 덩치를 키우고 있다. 본의 아니게 글로벌 금융시장에 합종연횡의 빅뱅이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지나가고 나면 한 세기를 풍미해 온 월가의 지도도 완전히 바뀌게 될 전망이다. 월가 전문가들은 “IB(투자은행)의 시대는 가고 상업은행의 시대가 왔다”고 말했다.

◆못 팔면 죽는다=영국 BBC 방송은 17일(현지시간) 영국에서 여섯째로 큰 핼리팩스스코틀랜드(HBOS) 은행이 5위 은행인 로이드TSB에 팔렸다고 보도했다. 고든 브라운 총리까지 나서 매각 협상을 독려했다. 고객 2200만 명, 예금액이 2500억 파운드인 거대 은행의 파산에 따른 혼란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택담보대출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영업을 해온 HBOS는 올 들어 부동산 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부실 자산이 급증했다. 파산설에 시달리다 17일에는 주가가 50%나 하락하기도 했다.

미국의 5대 투자은행 중 이미 세 곳이 파산하거나 팔렸다. 남은 골드먼삭스와 모건스탠리도 편치 않은 상황이다. 모건스탠리는 인수 후보자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뉴욕 타임스(NYT)는 모건스탠리가 와코비아 은행과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고, CNBC 방송은 중국 중신증권(CITIC)이 인수 후보자라고 전했다. 모건스탠리는 16일 예상을 뛰어넘는 3분기 실적(순이익 14.3억 달러)을 발표했지만 시장은 냉담했다. 16일에 이어 17일에도 주가가 24.2% 급락했다. 버티던 모건스탠리도 인수자를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저축대부업체 워싱턴뮤추얼은 골드먼삭스를 매각 주간사로 선정했다. 인수 후보로는 웰스파고와 씨티그룹이 거론된다고 NYT가 전했다.

매각에 실패해 파산한 리먼브러더스의 교훈이 남은 금융회사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을 주무르던 거대 금융회사들에 매각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못 팔면 더 참혹한 결과가 온다는 것을 생생히 지켜본 이상 마냥 버틸 수는 없게 된 것이다. 매각에 실패한 리먼브러더스의 경우 불과 2억5000만 달러에 북미 영업조직을 바클레이즈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베어스턴스도 주당 2달러(나중에 10달러로 인상)라는 굴욕적인 가격에 JP모건에 인수됐다.

◆금융산업 지도가 바뀐다=팔리고 있는 회사는 대부분 투자은행들이다. 모건스탠리까지 넘어갈 경우 5대 투자은행 중엔 골드먼삭스만 남게 된다. 투자은행들은 그동안 엄청난 실적을 자랑하며 월가를 주도해 왔다. 하지만 실적을 유지하고 늘리기 위해 지나치게 위험한 파생상품을 마구 팔아 왔다. 그러나 파생상품 거품이 터지자 생존 자체가 어려워진 것이다.

BNP파리바의 채권 애널리스트인 다니엘 스켐브리는 “시장은 투자은행 모델이 사라지길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 타임스는 “마지막 남은 골드먼삭스도 중소 규모의 은행을 매입해 합병하는 길을 걸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상업은행들엔 새로운 기회가 오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정부로부터 까다로운 규제를 받아 왔다. 서민들의 예금을 보호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덕분에 위험 자산에 대한 투자가 적었다. 상업은행들은 상대적으로 든든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경쟁자들을 사들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이에 대해 “은행들이 기본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전했다.

최현철 기자

1. 미국 저축대부조합(S&L) 위기(1989년 8월, 2000억 달러)

아버지 부시 대통령 시절, 저축대부조합이 도산 위기에 몰리자 2000억 달러 규모의 구제금융책을 발표. 1000개가 넘는 조합이 문을 닫은 후 1995년이 돼서야 사태가 진정.

2. 한국 외환위기(1997년 12월, 780억 달러)

보유 외환이 고갈되자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 한국 정부는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고금리 정책과 재벌 개혁 등의 고강도 조치 수용. 경제 위기는 정권교체를 불러오기도.

3. 인도네시아 금융위기(1998년 1월~99년 4월, 580억~647억 달러)

1997년 8월 이후 자국 통화 가치가 폭락하고 물가 상승률이 80%까지 치솟는 금융 위기에 직면. IMF의 구제금융 이후에도 수년간 경제 상황이 호전되지 않음. 9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수하르토 정권 붕괴.

4. 브라질 경제위기(1998~2002년, 세 차례 합쳐 1097억 달러)

IMF는 아시아의 외환위기가 남미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구제금융 제공. 그러나 통화가치가 20% 떨어지고 공공부채가 늘어나는 등 상황이 계속 악화, 2001년 8월과 2002년 8월 추가 구제금융.

5. 아르헨티나 경제 위기(2000~2001년, 두 차례 합쳐 522억 달러)

16%에 달하는 높은 실업률과 재정이 거덜난 상황에서 150억 달러의 대외채무 만기가 다가오자 IMF와 세계은행 등에 구제금융을 요청. 2001년 12월 810억 달러의 대외채무에 대해 채무불이행(디폴트) 선언.

※미국 금융위기(2007년 6월~진행 중, 2850억 달러+α)

2007년 6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가 부실화하면서 시작. 미국의 대형 투자은행 베어스턴스와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지고, 메릴린치는 인수당함. 국책 모기지 회사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는 2000억 달러의 공적자금이, 미국 최대의 보험사 AIG엔 850억 달러의 구제금융이 투입. 자료 : 포린폴리시 *금액은 2008년 현재가로 환산한 수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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