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업그레이드 악극’ 뜻밖의 수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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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미’로 분한 박해미(左)는 뛰어난 가창력을 보이며 뮤지컬 배우로서의 대중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트라이프로 제공]

노골적인 통속성의 승리.

15일 서울 공연의 막을 내린 뮤지컬 ‘진짜 진짜 좋아해(사진)’는 2008년 한국 뮤지컬계 ‘의외의 발견’이다. 이미 ‘철 지난’ 1970년대 영화와 ‘한물 간’ 70·80 가요를 축으로 했지만 대형 창작 뮤지컬로는 드물게 앙코르 공연까지 이어지며 공연 횟수 100회를 돌파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초연치고는 이례적으로 돈도 벌어 2억원 이상의 수익을 남겼다. “개연성 떨어진 엉성한 짜깁기” “전형화된 인물로 빚은 순정만화 수준”이라며 평단은 혹평했지만 대중은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택했다.

#중장년층을 위로하다

공연 마지막 날이었던 15일 서울삼성동 코엑스 오디토리움. 추석 연휴 덕분인지 가족 단위의 관객이 특히 많았다. 머리 희끗한 노년층은 물론, 꼬마들도 제법 눈에 띄었다. 무엇보다 공연의 주 관객은 남녀를 불문하고 40~50대였다. 20, 30대 여성 관객이 주를 이루는 타 뮤지컬과는 확실히 달랐다.

중장년 관객이 몰린 건 친숙한 과거 히트곡들을 스토리와 함께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엔 모두 23곡의 노래가 나온다.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으로 무대를 연 작품은 조용필의 ‘못찾겠다 꾀꼬리’로 심박수를 끌어올리더니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로 아스라한 여운을 이어갔다. 대학가요제 히트곡 ‘내가’가 나올 땐 객석도 함께 들썩였고, ‘너를 사랑하고도’에선 눈물을 훔치는 여성도 눈에 띄었다.

이웃 주민들과 함께 왔다는 주부 김미선(52)씨는 “뮤지컬하면 괜히 내가 가선 안 되는 공연 같아서 주눅 들곤 했는데, 우리 같은 중년들도 마음껏 볼 수 있어 너무 반가웠다”고 말했다.

#관객과 호흡하다

첫 막은 변사가 이끈다. 그는 공연에 앞서 관객을 모두 일으켜 세운다. 무대 중앙엔 태극기가 등장하고, ‘국기에 대한 맹세’도 나온다. 마치 70년대 ‘대한 늬우스’ 직전의 극장 안 풍경과 흡사하다. 어이없는, 한편으론 유치한 설정이지만 철저히 복고와 향수를 팔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공연을 하기 전엔 배우들이 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팸플릿을 판다. 사고파는 사람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 가는지 몽땅 마이크를 타고 실시간 중계된다. 그게 또 재미다. 마치 꼬마 관객을 대하듯 공연 전 박수 연습도 하고 함성도 질러줄 것을 얘기한다. 유랑극단의 바람잡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관객의 호응은 제법 높다.

이는 본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다. 엉뚱한 애드리브로 폭소를 자아내는 경우가 허다하고, 연기를 하는 틈틈이 손을 뒤로 뻗어 박수를 유도하기도 하며, 자기가 아는 노래가 나올 때 관객도 자연스럽게 따라부른다. 점잔 빼고 목에 힘주는 뮤지컬이 아닌, 콘서트나 디너쇼를 방불케 한다. 커튼콜 때 모두 일어나 춤을 추며 엉덩이를 흔드는 건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퇴행인가 현실인가

‘진짜…’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친숙한 인기 가요만을 나열해 놓고 억지로 스토리를 짜맞추었다고 꼬집는다. 여기에 현실성이 거세된 캐릭터는 완성도를 조금씩 높여가고 있는 한국 뮤지컬을 오히려 퇴행시켰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작품의 군무 장면과 노래들의 병렬식 조합은 1900년대 초반 미국에서 정통 뮤지컬이 탄생하기 직전에 유행한 ‘보더빌’을 연상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반론도 만만찮다. 서울문화재단 안호상 대표는 “해외 유명 작품들이 무차별적으로 수입됨에 따라 한국은 뮤지컬에 대한 충분한 학습을 경험하지 못한 채 다소 기형적인 관객층을 양산해 왔다. ‘진짜…’는 악극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자, 그동안 훌쩍 건너뛴 한국 뮤지컬의 기초를 다져 관객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진짜…’는 연말까지 14개 지방도시를 순회한 뒤 내년 초 서울에서 다시 올려질 예정이다. 02-742-7251.

최민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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