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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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여자는 어째서 남자의 그릇 안에서만 살아야 하고,남자가 깔아놓은 궤도 위만 달려야 하는가.
이 세상의 모든 아내들이 한번쯤은 가졌음직한 회의(懷疑)가 을희를 뒤덮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려는 남자의 아내.자기에게 필요한 여자를 우선 육체적으로 점찍어 철저히 이용하는 남자의 아내.심한 자기혐오를 온몸으로 느꼈다.
열두살이나 손위인 주인집 마님에게 한자를 배우며 남편은 그녀를 범했다.연상의 그 여인은 안정된 경제생활을 누리고 있어 남편이 가계(家計)를 돌봐줄 필요도 없었고,그녀의 교양과 지식을정성껏 전수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독신」임을 내세운 참으로교묘한 계략이 아닌가.
을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온 까닭도 이제야 알만했다.
볼나위 없이 망하긴 했어도 을희에겐 「명문가」라는 가문의 배경이 있었다.6대조 할아버지는 문장으로도 이름을 드날린 조선조의 정승이었다.그후에도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냈다.조선총독부가기승을 부린 일본 강점 시절엔 전답(田畓)을 팔 며 「양반」체모를 간신히나마 유지해 왔다.
아무개 아들이라거나 아무개 자손이라거나 하여 내세울만한 배경을 전혀 갖지 못한 남편으로서는 을희의 「가문」 허울이 탐났을것이다.장사관계로 만나는 사람마다 을희의 6대조 할아버지 자랑을 했다.관리들에겐 특히 그 사실을 강조했다.그 에게 있어 을희는 더할 나위 없는 금박(金箔) 장식인 셈이다.
을희의 영어회화 실력도 겨냥거리였을지도 모른다.첫 남편과의 결혼 때문에 대학을 중퇴할 수밖에 없었지만 을희의 영어에 대한지식은 상당했다.오빠 덕이었다.
영문학을 전공한 오빠는 해방 직후 미국 군정청(軍政廳)의 고위장교 통역관으로 일하고 있었다.그는 틈만 나면 누이동생에게 영어회화 교습을 해주곤 했다.그 열의를 외면하기가 미안해서 따라하는 척하던 공부가 피난살이에 보탬이 될 줄은 미처 몰랐다.
남편의 영어회화는 그야말로 「하우스 보이스 잉글리시」였다.명사와 동사만 나열하고 나머지는 깡그리 빼버리는 마구잡이 회화다.그 명사와 동사라는 것도 1백단어의 「기초영어」정도에 불과했다.그래도 곧잘 통했다.천성적인 쾌활함과 배짱이 브로큰 잉글리시를 애교스럽고 박력있는 것으로 둔갑시켜 주었으나 천박함은 어쩔 수 없었다.미군 상대의 사업을 보다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교양영어」가 필요했다.을희는 그래서 그의 사냥 대상이 됐을 것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던가.자신의 처지도 처지지만 열두살 손아래 남자의 사냥거리가 된 여인이 새삼 측은했다.
글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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