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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사오십년 농익은 그 깊은 ‘시 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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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술만 익을수록 맛이랴. 시(詩)도 틀림없이 그러하리라. 고희(古稀)를 넘긴 두 원로 시인의 신작 시집을 펼쳐본다.

고은 시인은 1933년 전북 군산에 태어나 전쟁으로 학교를 마치지 못한 채 18세에 출가했던 이력이 있다. 시력 50년.

정현종 시인은 1939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시력 43년.각각 한국 문단의 양대산맥인 창비(창작과 비평)와 문지(문학과 지성)의 대표 시인이다. 어느 길로 오르든 정상에 서면 같은 땅을 밟듯, 색깔이 뚜렷이 다른 두 시인이건만 만나는 지점이 있다. 미쳐 돌아가는 세태에 휘말리지 않고 냉철히 바라보는 시인의 눈이 있다.

 “왜 세상은/너도 나도/얼마짜리인가/왜 얼마짜리로/여기저기 팔려가는가/왜 얼마짜리로/미쳐버리는가 미쳐 날뛰는가/아, 공짜배기 내 고향은 어디로 가버렸는가”(고은 ‘울란바타르의 마음’ 중)

“돈과 기계에 마비되어/바삐 움직이면서/시간을 돈 쓰듯 물건 쓰듯 쓰기만 하고/시간 자체!를 느끼는 일은 전무한 듯/하니, 시간의 꽃인 그 시간 자체는/어떻게 되었는가./(…)꽃 시간은 희귀하게 동터오니/이미 망한 세상에서 우리는/이미 망한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여지없이 망한 인생임에 틀림이 없다”(정현종 ‘꽃 시간2’ 중)

돈과 기계에 마비된 보통 사람들은 꿈에 로또 숫자가 탁 떠오르길 기대한다. 그러나 시인들은 꿈에서 시를 기다린다.

“잊었다/새벽 꿈속/시 한수 와 있다가/꿈 깨이자/천리 밖으로 갔다/굳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는다//가서/세상의 티끌이거라 나의 시라는 것들 다 남의 핏줄이니라/돌아오지 마라”(고은 ‘자각’ 전문)

그런데 꿈에서 깨는 ‘자각’의 순간 시는 달아나버린다. 자각이 곧 망각이다. ‘아이구 아깝다’란 탄식은 꿀꺽 삼킨다. 잊어버리든, 적어 내어놓든 품을 떠난 시는 ‘남의 핏줄’. 집착을 버린다.

“잠결에/시가 막 밀려오는데도,/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지구라는 이 알이 알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시간이 영원히 온통/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잠을 청하였으니……”(정현종, ‘시가 막 밀려오는데’ 중)

시 쓰는 일이란 천형(天刑)이라 했다. 때론 제 발로 걸어오는 시마저 훠이훠이 쫓아내며 시에 붙들린 운명을 놓아버리고 싶을 터다.

“지금부터 쓰는 시는/시집도 내지 말고/다 그냥/공기 중에 날려버리든지/하여간 다 잊어버릴란다./그럴란다./(아이구 시원해)”(정현종, ‘지금부터 쓰는 시는’ 전문)

시 몇 수 남기고 하직했다면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길이 남았을지도 모를 일. 동료들을 수없이 떠나보내며 40년, 50년 시를 쓰는 건 축복이자 짐이다.

“이 시간이면/올 사람이 왔겠다 생각하니/슬프다./갈 사람이 갔겠다 생각해도/슬플 것이다./(왜 그런지)/그 모오든 완결이/슬프다.”(정현종 ‘슬프다’ 전문)

“오랜 두려움 끝/이제 두렵지 않다/오전의 하늘에 없던 구름이 슬쩍 와 있다/구름 밑/산이 간다/산 밑/산그늘이 간다/그동안 내가 나에게 목숨 바쳤다//정말이지/죽음은 남이 아니다 아니구말구”(고은 ‘죽음을 보며’ 전문)

죽음마저 끌어안는 시인에게도 두려운 게 하나 있다. 11일 저녁 고은 시인의 등단 50주년 기념 그림전 폐막 뒤풀이 자리. 밤이 깊어갈 무렵 시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응~. 오늘 마지막 날이라 친구들이랑 술 한 잔 하고 있어. 오늘만 양해해줘요.” 아내 이상화 중앙대 교수의 전화였다. 너무나 사랑해서 두려운 존재, 아내.

“엄마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지나간다./뭐라고 뭐라고 딸이 옹알거리고/뭐라고 뭐라고 엄마가 되풀이한다./나는 누구인가./나는 저 딸아이가 낳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정현종 ‘거대한 무의식’ 중)

“너 낳은 몸/너 기른 몸/너에게 말과 무언을 준 몸/저 끝 간 데 모를 푸른 하늘이/아득히/아득히/네 에미니라//그동안의 삼천년 잘못이었다/하늘은 네 아비가 아니라/네 에미니라”(고은 ‘에르푸르트에서’ 중)

생명을 낳는 여성에 대한 경외감은 하늘과 땅, 음양의 순서까지 바꾸어 말할 정도로 강력하다. 명절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앓는 한가위, 노시인의 깨달음이 담긴 시 한 수가 가정의 평화를 지켜줄지도 모를 일이다. 

이경희 기자 , 일러스트=이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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