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우 부모의 특별한 자녀 교육법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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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재단? 사실 처음에는 내 살라꼬 만들었지요.”

지난달 25일 대구시 동구 진인동, 팔공산 자락의 더불어복지재단에서 만난 권기홍(59) 전 노동부장관은 10여 년 전 복지재단을 설립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들 순욱(34·뇌병변 1급)이 놈은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해요. 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고 내 새끼 혼자는 도저히 교육시킬 엄두가 안 나더라고.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과 함께 지내면서 내 아이의 아픔도 치유해 주고 싶었어요.” 영남대 교수·노동부 장관·단국대 총장…. 세인의 부러움을 살 만한 성공가도를 달려온 권 전 장관. 그러나 그의 내면엔 진한 아픔이 오래도록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유학 시절 알게 된 아들의 장애

권 전 장관은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던 1973년 서정희(60·더불어복지재단 이사장)씨와 결혼했다. 이듬해 임신 6개월이던 서씨를 남겨두고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당시 구직난이 심각했어요. 더욱이 독문과 출신은 취직이 ‘별따기’였던 시절이었죠.”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에서 경제학학부과정부터 다시 시작한 권 전 장관은 75년 1월, 서씨와 생후 6개월 된 아들을 독일로 불러 살림을 꾸렸다.

“처음에는 장애인지도 몰랐지. 고개를 못 가누길래 ‘남들보다 늦나보다’ 생각했어요.”

돌잔치를 계기로 아들의 장애를 알게 됐다. 함께 자리했던 한국인 의사는 얼마후 권 전 장관 내외를 불러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정밀검사를 권유했다.

“생후 3~6개월 사이 바이러스에 감염돼 뇌세포가 파괴됐습니다.” 날벼락 같은 뇌성마비 판정이었다. 물리치료를 비롯해 갖은 방법을 써 봤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냉엄한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한국과 독일, 장애복지제도의 수준차

“독일의 장애인 복지는 정말 부러운 수준입디다.” 권 전 장관은 “우리의 실정과 비교하면 천양지차”라고 소개했다. 돌이켜보면 독일에서 살았던 10여 년은 ‘낙원’이었다. 유학생 신분임에도 장애인 자녀를 둔 까닭에 매달 600 마르크의 정부보조금을 지원받았다. 당시 유학생이 한달 400 마르크 정도면 생활할 수 있을 때였다. 아들이 만2세가 되던 때부터는 장애인 시설에서 뇌성마비 장애인에게 맞는 맞춤식 무료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한 반 7~8명 장애인에게 정교사 1명, 보조교사 1명, 보모 1명이 따라붙었다.

“병원 데리고 다니라고 기름값 지원해주지, 차량 감가상각비까지 정부에서 대주지, 좋은 환경에서 교육 받을 수 있도록 해주지… 그때는 살만 했지….” 권 전 장관은 당시를 회상했다.

84년 박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의 사정은 달랐다. 열살 난 아들을 대구의 한특수학교 1학년에 입학시켰다. “우리나라 특수학교는 말로만 ‘특수’예요. 어떤 장애를 가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초등 고학년됐다고 영어를 가르치더라고요. 덧셈·뺄셈도 못하는 애한테 이차방정식은 또 뭐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학교에 가서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애한테 영어를 가르쳐서 뭐하냐’고 따졌어요. ‘고학력 시대인데 대학 보내야 되지 않겠느냐’고 되묻더구만. 참 어이없는 일이지요.”

복지재단 설립을 결심하다

순욱씨가 특수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같은 학교 학부형이 “시간 좀 내달라”며 권전 장관을 붙들었다. 장애인 자녀에게 3000만원을 남겨두고 죽는 게 좋을지, 아니면 자신이 죽을 때 같이 죽는 게 좋을 지 물었다. 3000만원이라는 돈도 자신의 장기를 팔아 마련할 계획이라 했다. “충격적으로 들리죠? 그러나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의 90% 이상이 비슷한 생각을 한답니다.”

이때부터 권 전 장관은 복지재단 설립을 마음먹었다. ‘내 아이와 비슷한 처지의 장애인들이 편히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겠다’는 의지를 세웠다.

이후 주위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좋은 일 하는 데 돈 좀 보태라”며 재단설립 기금을 모았다. 1000원, 2000원이라도 보탠 사람들에게는 회계보고서를 보냈다. 뜻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해가 갈수록 후원인 수는 급격히 늘었다. 97년 2월, 그동안 모은 기부금에 사재까지 털어 마침내 팔공산 자락에 ‘더불어복지재단’을 설립했다.

장애인을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

40평 규모, 13명의 장애인과 함께 출발한 더불어복지재단은 10년 새 100여 명의 장애인이 함께 사는 대형 복지시설로 성장했다. 2000년부터는 대구 남구청의 위탁을 받아 남구장애인 복지센터까지 운영하고 있다. 그가 돌보고 있는 장애인 수만 200명이 넘는다. 권 전 장관은 “많은 장애인들이 이곳에서 머물고 싶어한다는 사실이 반갑다. 하지만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일할 수 있는 실질적 여건을 만들어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부장관 출신답게 “한국의 장애인 고용제도는 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 취업률은 높아지고 있지만, 실질취업률은 답보상태라는 것. 일반 기업체에서 근로자 2%를 장애인으로 고용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지만, 장애유형이 다양해 지면서 실질적 도움을 받아야 할 정신지체 장애인은 오히려 열외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 전 장관은 “우울증도 장애고, 교통사고 후유증도 장애다. 장관 시절 조사해 보니 대다수 기업이 이런 사람들을 ‘장애인’으로 올리고 기준을 충족했다고 하더라”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근로유형별 장애기준을 재편성해야 한다”며 “회사가 장애인을 고용하면서 생산성 측면에서 손해보는 부분을 재정지원으로 메워준다면 장애인의 실질취업률도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프리미엄 최석호 기자
사진= 프리미엄 최명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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