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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마 사막” 외치던 학생들 향해‘탕 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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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대학생 100여 명이 외쳤다. ‘롱마 사막(사막 총리 퇴진).’

순간 학생들 뒤편에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오토바이 한 대. 검은 옷에 두꺼운 헬멧을 쓴 두 명의 청년이 타고 있었다. 뒤편에 앉은 청년이 뭔가를 빼들었다. 그리고 ‘탕 탕’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시위대 뒤편에 있던 학생 2명이 풀썩 주저앉았다.

4일 오후 8시30분(현지시간) 방콕시내 소이 나바민트 17번가 거리에서 일어난 상황이다. 방콕시내 람캄행 대학생들인 시위대는 이날 밤 이곳에서 7㎞쯤 떨어진 순타라웻 총리 관저까지 가두 시위를 하던 중이었다. 정부가 이날 오전 사태 해결을 위해 조만간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힌 데 대한 반대 시위였다. 각각 허벅지와 팔꿈치에 관통상을 입은 두 학생은 곧바로 인근 스리 시암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고 병원 측은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22 구경 권총에 맞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밤 시위대 간 충돌 때 총격으로 1명이 숨진 데 이어 총격사건이 재발한 것이다. 대학생 200여 명은 5일 오후 시내 중심부 파라곤 쇼핑센터에 모여 총격을 한 범인 검거를 촉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으로 반국민투표 움직임이 급격히 확산되고 있고 투표 성사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11일째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있는 시민민주주의연대(PAD) 소속 시위대 5000여 명은 5일 오전 “학생 시위대에 대한 총격은 명백히 정부가 보낸 조직원의 소행”이라며 “사막 정부는 이제 민주를 논할 가치조차 없는 정권”이라고 맹공했다. 손티 림퉁쿨 PAD 공동대표는 “국민투표는 민주적 절차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총질이나 하고 있는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극에 달해 있어 총리 사퇴만이 유일한 사태 해결책”이라며 강조했다. 전날 사막 총리의 ‘사퇴 불가’ 방송연설을 지켜본 아사나 나우암(타이항공 직원)은 “국민의 뜻을 읽지 못하는 총리의 뻔뻔함에 분노가 치밀어 온다. 앞으로 국민투표 반대 운동에 앞장설 것”이라고 말했다. 5일 오전에는 태국 선관위 프라판 나이코윗 선관위원장이 “국민투표 준비에 최소한 90~120일이 걸린다”며 조기 국민투표 불가 입장을 밝혔다. 전날 태국 정부가 밝힌 한 달 내 투표 실시를 정면 부인한 것이다.

태국 공기업 노조대표들도 4일 아누퐁 파오친다 육군 총사령관과의 면담을 거부했다. 공기업 노조연맹(SERC)의 사윗 캐완 위원장은 “군 수뇌부로부터 사태 해결을 위해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으나 총리가 사퇴 대신 국민투표를 발표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화는 필요 없다”고 밝혔다.

태국 최대 경제단체인 상공회의소의 퐁삭 아사쿨 부회장은 5일 “태국은 비상사태 선포로 해외 투자자의 신뢰를 잃었으며 국가재난이 닥쳐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투표는 말이 안 된다. 사막 총리는 국가지도자로서 책임 있는 결단을 할 필요가 있다”며 총리 사퇴를 간접적으로 요구했다.

태국무역협회도 성명을 내고 “이미 여론이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이상 국민투표는 정정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정정 혼란이 계속되면서 인접국으로는 처음으로 말레이시아가 접경경비를 강화했다.

4일 말레이시아 버나마 통신에 따르면 아미르 함자 이브라임 말레이시아 경찰청 차장은 “태국 사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으며 갑작스러운 난민 유입에 대비해 국경지대 경찰력을 대폭 늘렸다”고 밝혔다.

그러나 오랜 시위로 경제가 갈수록 악화되자 시위 반대와 ‘대화와 타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늘고 있다. 태국 북부 치앙마이대 학생 50여 명은 5일 오전 정부와 PAD의 대화를 위해 자신들이 중재하겠다는 뜻을 현지 언론을 통해 정부와 시위대 측에 전달했다. 학생대표 퐁폰(경제학과 4년)은 “대화와 타협이 없는 현 정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다”며 “서로 한 발씩 양보하는 자세만이 사태해결을 가져올 수 있어 중재 제의를 했다”고 말했다. 국회도 대화를 통한 사태 해결을 촉구하고 나섰다. 차이 치드홉 하원의장은 4일 시위대를 향해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이다. 민주적 절차를 통해 구성된 내각을 해산하고 총리를 사퇴하라는 것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대표들이 공개 토론을 해 사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태국 소비자보호청 관계자 10여 명은 4일 오후 시위대가 점거 중인 정부청사로 가 이번 주 중 시효가 만료되는 소송 관련 서류를 내 달라고 시위대에 요구했지만 “지도부 논의를 거쳐 결정하겠다”는 답변만 들었다. 소비자 보호청 관계자는 “소비자 보호용 소송서류까지 가져가지 못하게 막는 것은 시위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라며 시위대를 비난했다. 지난 3일 저녁에는 태국 국영TV에 치앙마이 시민대표 20여 명이 출연했다.

그들은 “시위로 경제가 죽는다”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었다. 이들 대표인 미히티룩은 “어떻게 정부청사를 점거하고 민주주의를 외칠 수 있는가. 이번 시위로 외국 관광객이 급감해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다. 정부는 하루빨리 시위대를 해산시켜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외쳤다.

 방콕=최형규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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