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이 바둑 명인열전] 일본 명인 슈사이편 마치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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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바둑명인열전 슈사이 편을 끝내면서 아쉬움이 남아 후기를 쓴다. 슈사이란 인물이 오늘의 바둑계를 자꾸만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슈사이는 400년 이어온 일본 최고 바둑 가문인 본인방 가(家) 의 문을 닫으며 본인방이란 이름을 기전 이름으로 내놨다. 이리하여 1941년 ‘본인방전’이란 최초의 신문 기전이 출범하게 되고 그것이 오늘의 프로제도로 이어지게 됐다.

오랜 역사와 전통, 영광이 마감된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그런 일을 저지른(?) 이면엔 일부의 지적대로 이익에 민감한 슈사이의 고결하지 못한 인격이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결단이 현대바둑을 꽃피우게 만들었다는 것은, 최소한 크게 앞당겼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제 다시 한국과 일본의 바둑은 나란히 위기를 맞고 있다. 프로바둑이 지난 ‘60년 전통’만을 고수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할 때다. 좁은 입단의 문호 때문에 프로보다 실력이 강한 자가 바둑판을 떠나야 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이제 바둑은 과거를 접고 ‘스포츠’로 새 길을 열고 싶어한다. 하지만 제도는 거의 예전 그대로다. 그런 제도가 유소년들의 바둑 입문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프로 스포츠는 ‘실력 대결’이란 대 원칙을 벗어나서는 설 땅이 없다. 현재의 어떤 제도가 그 대 원칙을 훼손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슈사이의 은퇴기에서 그에게 생애의 1패를 선사한 기타니 9단은 기타니 도장을 세워 일본 바둑의 황금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러나 기라성 같은 그의 수많은 제자 중 누구도 기타니 도장을 이어가지 못했고 기타니 도장의 폐문은 곧장 일본 바둑의 쇠락과 이어지게 된다. 기타니 도장은 살려야 할 전통이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일본 바둑은 바둑에 필수적인 집단 연구에서 개인주의로 넘어갔고 실력은 날이 갈수록 약화되고 말았다. 어떤 전통을 살리고 어떤 전통을 마감해야 하는지 그 선택의 어려움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슈사이는 당대 한 명뿐인 9단이자 명인이었기에 65세의 나이에 신진 최고수인 기타니 7단에게 정선(定先)을 접어야 했다. 조남철 9단은 이런 엄격한 단위 제도를 비슷하게 받아들였고 이로 인해 본인은 끝내 8단에서 9단으로 승단하지 못했지만 한국의 단위는 권위를 갖출 수 있었다(8단은 승단대회에서 4단을 두 점까지 접어야 하기에 당대 일인자인 조남철 역시 승단 점수를 채울 수 없었고 그런 사이 나이가 들고 말았다. 그는 훗날 국내 9단 1호인 조훈현 9단이 탄생한 뒤 명예 9단이 된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단위 제도는 일본부터 무너지기 시작해 한국에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 바람에 일본은 9단이 가장 많은 이상 구조를 띠게 되었고 오죽하면 실력 없는 9단으로 인해 일본 바둑의 장래가 암울하다는 ‘일본 바둑 쇠망론’까지 나오게 됐다. 한국도 이제 모든 단 중 9단이 숫자로 가장 많아졌다. 역시 전통과 현실을 적절히 융화시키지 못한 케이스다.

다시금 과도기, 또는 변환기에 들어선 한국 바둑은 최근 ‘64강 이상 상금제’와 ‘대국료 폐지’ 등 경쟁 강화를 뼈대로 한 개혁 방안을 놓고 진통을 겪고 있다. 1941년 이후,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전문기사(프로)는 대국을 하면 돈을 받았다. 그걸 폐지하고 골프나 테니스 같은 잘나가는 다른 스포츠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자에게만 돈을 주는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해 인기를 높이자는 의도다. 다시 전통의 문제에 직면한 바둑계가 어떤 선택을 할지 주목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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