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 “한 발만 물러나면 낭떠러지 평생 모서리에서 야구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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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경기가 끝나자 그의 배번과 같은 38발의 축포가 문학구장 야경을 수놓았다. 전광판에는 과거 영상들이 흘렀고, 66세 노인이 1000승 기념 티셔츠를 입고 그라운드에 등장했다.

김성근(66) SK 감독이 3일 인천에서 히어로즈를 8-0으로 이겨 프로 통산 1000번째 승리를 거뒀다. 17시즌 동안 1941경기를 치러 49번 비기고, 892번 진 끝에 얻은 열매다. 김응용 삼성 사장이 1983~2004년 이뤘던 1476승(2679경기)에 이어 프로야구 두 번째 1000승 달성이다.

김응용 감독은 선동열(해태)·이승엽(삼성) 등 엘리트 선수들을 앞세워 양지에서 승리를 쌓았다. 친구(호적상 두 살 많은 김응용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인 김응용과 가장 대비되는 인물이 김성근 감독이다.

그의 야구는 ‘모서리 야구’다. 야구도 인생도 늘 위기였고, 항상 혼자였다. 김 감독은 “평생 모서리에 있는 심정으로 야구를 했다. 한 발만 물러나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진다는 절박함으로 살았다”고 돌아봤다.

일본 교토에서 태어난 그는 스무 살이던 62년, 야구를 하기 위해 혼자 한국으로 건너왔다. 김 감독은 “한국말이 서툴렀던 내게 야구는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사람들이 ‘반 쪽발이’라고 손가락질할 때마다 ‘그래, 내가 너희를 이겨주마’라며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눈물 흘려 만든 결과물이 1000승”이라고 회상했다.

뛰어난 왼손 투수였던 그는 어깨 부상 탓에 64년 은퇴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은행 창구에 앉을 수도 없어 지도자로 승부를 걸었다. 눈썰미와 두뇌회전이 남달랐던 그는 한 차원 높은 지도력을 보였고, 스스로에게 했던 만큼 제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이후 기업은행-충암고-신일고 감독을 거친 그는 프로 원년인 82년 김영덕 감독의 부름을 받아 OB 코치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84년에는 OB 감독에 올랐다. 대주자·대수비·왼손 대타요원 등 프로 초창기에 생소했던 역할들을 그가 만들어냈다. 그는 매년 전력 이상의 성적을 거뒀지만 여섯 차례나 구단에서 쫓겨났고, 주변의 시기와 질투를 끊임없이 받아왔다.


그래도 승리에 목마른 팀들은 김성근을 그냥 두지 않았다. 시대는 항상 이기는 야구를 요구했고, 김성근 감독의 야구는 끊임없이 변하고 진화하며 승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내가 모서리에서 1000승을 이룬 건 내 인생이, 내 야구가 그만큼 변했다는 거다. 어제 승리는 어제로 잊는다. 노력과 발전을 잠시라도 멈췄다면 내 야구는 진작 끝났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 감독은 2002년 하위권으로 분류된 LG를 한국시리즈까지 진출시켰다. 한국시리즈 상대였던 삼성의 사령탑은 라이벌이자 친구였던 김응용 감독이었다. LG는 이승엽·마해영의 홈런으로 무너졌지만, 김성근 감독은 영웅이었다. 승장 김응용 감독은 “(약한 전력으로) 어떻게 야구를 저렇게 한단 말인가. 김성근 감독은 야구의 신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LG는 고집불통인 ‘야구의 신’에게서 지휘봉을 빼앗았다. 통산 862승에서 멈춘 그는 한국 야구에 대한 미련을 접고 2005년 일본 롯데 코치로 부임했다. 일본에 진출한 이승엽이, 메이저리그에서 재기를 노리던 박찬호가 김 감독을 찾아 야구를, 인생을 배웠다. 김 감독의 야구도 또 한 단계 진화했다.

그는 지난해 SK 감독을 맡아 국내로 돌아왔다. 일본식 스몰볼, 미국식 롱볼의 경계는 이미 넘었다. 김 감독은 빠르고 조직적인 한국식 야구로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차지했다. SK는 올해도 사실상 정규시즌 1위를 예약했다.

김성근 감독은 “1000승은 오늘로 잊겠다. 내일 1승을 위해 또 새롭게 고민해야 한다”며 경기장을 떠났다. 야구하느라 늙을 새도 없어 늘 청년 같은 모습이었다.

인천=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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