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장 여자? 천재 화가를 향한 대담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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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문근영 분)은 남장 여인으로 설정된다(사진 위). 김홍도(박신양 분, 사진 아래)와는 도화서 스승과 제자로 인연을 맺어 불세출의 그림 대결을 벌이게 된다.

18세기 조선의 천재 화가 혜원(蕙園) 신윤복을 향한 대중문화의 구애가 뜨겁다. ‘남장 여자’였다는 둥(『바람의 화원』), 일본의 전설적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가 실제론 혜원이라는 둥(『색, 샤라쿠』)
팩션 소설의 상상력이 다채롭기 그지없다. 이에 힘입어 드라마·영화도 한창 제작 중이다. 시대를 풍미하고 홀연히 사라져버린 풍속화의 거장이 21세기 한국 사회에 되살아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 후기 풍속화가 신윤복(1758?~1813 이후)을 남장 여자로 등장시킨 소설 『바람의 화원』(이정명 지음, 밀리언하우스)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더니 드라마로 제작되는가 하면 신윤복을 성적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미인도’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신윤복이 주인공인 팩션도 계속 창작 중이다. 가위 ‘신윤복 신드롬’이라 부를 만하다.

지금은 팩션 장르가 신윤복을 주목하고 있지만, 그간 혜원(蕙園) 신윤복에 대한 독자적인 학술서는 물론 교양 대중서도 그리 흔하지 않았다. 한문학자 강명관의 『조선 사람들, 혜원의 그림 밖으로 걸어 나오다』 정도가 그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렸다. 동시대 또 한 명의 걸출한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1745~?)를 다룬 책은 많은 반면 신윤복은 이 책 저 책에 조금씩 널려 있었다.

예컨대 미술사학자 오주석은 『단원 김홍도』같은 연구서를 내면서도 혜원 신윤복에 대해서는『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나 『한국의 미(美) 특강』에 부분적으로 언급했다. 굳이 대비해 보자면 김홍도는 비교적 점잖은 풍속을 다뤄 권장의 대상이지만 신윤복은 미인·기녀를 주로 그려 내놓고 화제 삼기에는 부담스러웠을지 모른다.

영상매체와 어우러지는 화풍
그렇다면 오늘날 신윤복 신드롬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일단 미의 관점에서 신윤복은 미디어의 선각자다. 그림은 현실을 비추는 오늘의 미디어와 같다. 미디어는 무엇보다 아름다운 존재를 비춘다. 이에 풍속화가 김홍도보다 ‘미인도’의 신윤복이 각광받는지 모른다.

신윤복 신드롬에는 또한 대중의 마음이 담겨 있다. 대중적 정서는 주류의 질서를 넘어 새롭게 뭔가를 하려는 이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김홍도가 중인 계급인 화원의 신분을 넘어서는 창조적인 화가로 평가받지만, 지금 보면 신윤복이 더 혁신적이다. 김홍도는 성리학적 유교에 기초한 문인화 질서를 가로질러 풍속화로 ‘사람살이’에 주목해 관념적인 세계가 아니라 일상 삶을 화폭에 담아냈다.

임진왜란 이후 경제력 발달과 함께 나타난 그림을 향한 대중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신윤복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특정한 인물군, 즉 여성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신윤복의 그림에 기녀나 미인이 많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는 여성을 통해 사람의 아름다움에 주목했다. 또 기녀를 통해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유교질서를 풍자하고, 추상적 관념론을 우선시하는 화풍에 반기를 들었다. 주류 화풍에서 신윤복의 그림세계를 못마땅하게 여긴 것은 당연했다.

또 다른 신윤복의 현대적 코드는 ‘색’이다. 색(色)은 현실이자 구체적인 인간의 욕망이다. 문인화같이 관념적인 그림에서 색채는 중요하지 않다. 사물이 실제 모습과 달라도 ‘기개’ ‘절조’ 같은 관념원칙이 중요하다. 반면 일상생활을 다룬 그림에서 색채는 더 생생해야 한다. 신윤복 그림에서 아름다운 색채감이 특징인 이유다. 주류의 기록에서 신윤복의 평가는 절하되었지만, 아름다운 사람을 둘러싼 신윤복의 사실주의적인 색채감은 오늘의 영상 이미지와 맞는 면이 크다. 그렇지 않은 김홍도는 오히려 대중적 영상미에서는 인기가 떨어진다.

상상력 자극하는 미스터리한 삶
하지만 영상 이미지만으로 대중문화 콘텐트가 될 수는 없다. ‘이야깃거리’가 필요하다. 신윤복을 이야기 틀 거리로 끌어올린 것은 이정명의 팩션『바람의 화원』이다. 김홍도와 신윤복을 단절시키지 않고 스승과 제자 관계로, 여기에 ‘남장 여자’라는 제3의 섹슈얼리티를 접목시켜 극적 로맨스를 도드라지게 했다. 조선의 문예부흥을 일으킨 정조(1752~1800)를 등장시켜 음모와 추적이라는 스릴러 요소도 넣었다. 이는 예술과 정치·사회를 구분하는 이전의 시각들과 다른 점이다.

역사적 사실보다 픽션이 더 중요한 팩션에는 공식적 기록이 적은 인물이 적격이다. 도화서 화원이었지만 그림의 파격성과 역시 화원이었던 부친 때문에 공식적인 자리를 피한 일화가 이력의 전부인 신윤복은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 때문에 신윤복을 일본 화가 도슈사이 샤라쿠로 그리는 팩션 작품까지 나왔다. 김재희의 『색, 샤라쿠』는 1794년 10개월 동안 일본 에도에서 불꽃처럼 140여 점의 그림을 남기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전설의 화가 샤라쿠를 신윤복으로 설정했다.

이전에는 이영희 교수의 『또 한 사람의 샤라쿠』같은 책을 통해 김홍도가 샤라쿠로 추정되었지만, 이제 신윤복으로 바꾼 것이다. 샤라쿠의 강렬한 색감이 신윤복의 색감과 일치한다고 본 것이다. ‘색감’ 하면 인상파인데 샤라쿠의 우키요에(浮世繪)는 마네·모네·드가 등 전기 인상파는 물론 고흐 등 후기 인상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로써 신윤복은 단순히 한반도의 지역성이 아니라 세계적인 보편성을 지닌 화가가 된다. 민족의 코드는 어김없이 신윤복에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신윤복 신드롬에는 그간 한국 사회에서 유행했던 대중문화와 장르문학이 모두 모여 있다. 아쉬운 점은 있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연출 장태유)은 미스터리 추리극, 영화 ‘미인도’(감독 전윤수)는 남장 여성을 둘러싼 성애에 더 주목하고 있다. 그간에도 예술인을 다룬 국내 작품이 드물었고, 다뤄도 그들의 예술 세계를 깊게 형상화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번 신윤복 신드롬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그의 작품세계가 얼마나 잘 드러날지 지켜 볼 일이다.

김헌식 문화평론가 codess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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