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는 엄마’ 죄인 만들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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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호 07면

일러스트 강일구

SBSTV의 수·목 프로 ‘워킹맘’은 흥미를 끌 요소가 많은 드라마다. 아이 기르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애 보기’와 직장생활의 애환이라는 소재를 내세웠고, 육아의 짐을 피하고만 싶은 어머니 세대, 연하 남편 등 세태를 담은 인물로 채워져 있다. 김현희 작가는 ‘강남엄마 따라잡기’라는 전작에서도 주부들에게 가장 뜨거운 시사적 소재를 가져와 현실감 있게 그려냈던 바 있다.

이윤정의 TV 뒤집기

그런 저널리스트적인 김 작가의 안목이 꼼꼼하게 잡아낸 인물들이 펼치는 일화와 대사가 일단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당긴다. 손자들을 떠안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거나 아예 불가 선언을 하는 친정어머니, 아들보다 훨씬 능력 있는 며느리에게 틈만 나면 가사와 육아 문제로 트집을 잡는 시어머니, 얄밉기 그지없는 시누이, 무능한 데다 착하지도 않은 남편 때문에 주인공 염정아가 받는 스트레스는 옆에서 보는 사람까지 폭발시킬 정도다.

그 분노에 대한 공감이 이뤄지며 염정아가 가끔씩 휘둘러대는 주먹질과 이혼 통고 등이 속시원한 웃음을 준다. 그런데 한 회 한 회 지나갈수록 이 드라마에서는 뭔가 허전함이 느껴진다. 상황은 다 그럴 듯하고 에피소드들도 재미있는데 그 속에 있는 인간들의 관계나 주인공 하나하나의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는 전부 자신의 목적을 가진 사람만 있고 모두가 서로 상대를 제 목표를 위한 수단만으로 이용하려 한다. 주인공 염정아는 김자옥을 ‘애 봐주는 친정 엄마’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와 결혼시키려 하고, 김자옥의 딸 차예련과 아들 내외는 부자 엄마의 재산을 빼앗기기 싫어 그 결혼을 반대한다.

남편 봉태규는 부자 장모 김자옥에게 잘 보이려 싹싹하게 굴지만 김자옥은 외손자 길러 주는 일을 피하고자 사위 봉태규의 직장을 그만두게 만든다. 그뿐 아니다. 봉태규는 아이를 맡은 뒤에도 아내 염정아의 회사 일을 방해하려 하고, 차예련은 엄마 부부를 떼놓기 위해 형부 봉태규를 유혹한다. 신뢰 있는 인간관계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캐릭터들 역시 복합적이지 않고 일방적이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들이 목표를 향해 서로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최대한 과장함으로써 코미디의 요소를 짜내고 있다. 이처럼 등장인물 모두를 갈등 상황 속에서 서로의 장애물이 되는 존재로밖에 만들지 못하게 되자 한 갈등이 종료되면 더 큰 갈등만 만들면서 계속해 자극의 강도를 더해 가는 에피소드들만 시트콤처럼 덧붙여진다. 인물이 깊어지고 변해 가면서 드라마의 힘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상황만 깊어져 가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애초 ‘워킹맘’이라는 시사적인 소재에 대한 문제 의식도 희미해져 간다. 직장을 지켜야 한다는 주인공의 일념 탓에 아이들은 곧 터질 시한폭탄처럼 할머니에서 아빠에게로 혹은 외숙모에게로 이리 저리 넘겨지고, 주인공은 이처럼 가족들 여러 명을 돌아가면서 희생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대책 없이 셋째 아이까지 임신했다.

남편과 재결합하는 과정이 됐든, 과감히 싱글맘이 되든 상관없다. 주인공이 자신의 목표도 이루고 주변 사람들과도 서로를 ‘이용해먹는’ 것이 아니라 신뢰감 있는 관계를 맺으면서 정신적인 성숙을 얻는 걸로 드라마가 맺어졌으면 싶다. 그가 당위로 ‘일하는 엄마’가 되고 있는 우리 시대 여성을 일정 부분 대변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윤정씨는 일간지 문화부 기자 출신으로 문화를 꼭꼭 씹어 쉬운 글로 풀어내는 재주꾼입니다. filmpoo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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