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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강1만리>제2부 강소.절강성-소주 원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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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중국의 저명한 석학 이택후(李澤厚)는 예술과 미의 세계를「자연의 인화(人化)」라고 정의했다.이는 곧 대자연에 가까이 하려는 인간의 염원과 노력이 남긴 흔적이자 정신적.물질적 수단으로「예술의 미」가 존재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소주(蘇州)의 원림(園林)을 대하면서 우리는 바로 인간이 자연세계에 이르려 했던 욕구와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의 극치를 느끼게 된다.이상향으로서 대자연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이 원림예술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원이나 별장.서원.고궁 등에 서 볼 수 있는 정원의 의미와 상통하지만 중국에선 작은 자연속의 휴식공간과 문인묵객들이 시문을 짓고 교제하는 장소로,또는 종교적인 의미로도 널리 애용됐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4대 정원은 북경(北京)의 이화원.피서산장.졸정원(拙政園).유원(留園)을 꼽는다.이중 졸정원과 유원이 소주에 있다.이밖에도 소주에는 대형 정원이 8곳,중형이 13곳,소형이 20여곳에 이른다.비록 원림이라 부를 수 는 없지만 잘 다듬어진 정원도 28곳이나 된다.
본래 소주는 중국에서도 가장 정원이 밀집된 원림도시다.명나라때는 그 숫자가 2백71개소,청나라때는 1백30개소나 됐다.금세기 들어서도 원림 1백14개소에 정원 74개소 등 모두 1백88개소가 보존됐었다.그래서 오늘날 소주를 방문한 다는 것은 곧 원림을 방문한다는 뜻이며,소주 원림을 본다는 것은 중국 남방 원림의 정수를 대한다는 뜻과 직결된다.
최근에는 휴일이면 줄잡아 수십만명은 될법한 전국 각처의 관광객들이 붐비면서 발디딜 틈도 없이 빽빽해져 나무의 숲이 아니라「인간의 숲(人林)」을 이룬다.
소주의 명물인 이 원림의 역사는 춘추전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소대(姑蘇臺).관왜궁(館娃宮)과 삼국시대의 방림원(芳林苑)이 시초로 이중 고소대는 최초의 어용화원이다.
삼국시대 손권(孫權)이 집권할 때는 이미 강남의 가장 큰 도시로서 방림원 외에도 낙성원(落星苑).건사(建寺).영관(營觀)등을 지었다.동진시대에는 최초의 개인정원인 벽강원이 지어졌고 육조 이후엔 호족들의 강남 이동과 함께 많은 원림 이 지어진다.소주는 자연환경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원림지역이다.단아하면서도 수려한 강남지역의 전형적인 산수를 바탕으로 도시 곳곳에흐르는 물줄기가 85㎞에 달하며 한동안은 다리만해도 3백59개에 달했다.예부터 물의 도시라는 의미 인 수향(水鄕)이라 불렸으며 「동양의 베네치아」라 일컬어진 배경이다.
경제적 안정과 온화한 기후,문물이 번성한 장강유역의 자연정서가 모두 역사상 수많은 문인묵객이 모여든 원인이 됐다.
원림 중에서도 유명한 곳은 창랑정(滄浪亭)과 망사원(網師園).졸정원.사자림(獅子林).유원 등이다.이 가운데서도 규모나 자연의 함축미에서 가장 뛰어난 졸정원은 명나라때(1509년) 어사를 지낸 왕헌신(王獻臣)에 의해 지어진 대형 산 수 형국의 원림이다.진(晉)의 반악(潘岳)이 『한거부(閑居賦)』에서 「옹졸한 자가 정치를 하노니(是拙者之爲政也)…」라고 한데서 기인한명칭이다.「졸자위정(拙者爲政)」은 졸렬한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라는 은유로 세속의 출세를 탐하는 이에 대한 비웃음과 경멸이 담겨있다.
명나라 화가 문징명(文徵明)이 이곳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며비파원.소창랑.향주.견산루 등 누각과 소박하고도 대륙적인 스케일이 특징.호수 주위에는 명.청대 양식이 두드러진다.
사자림은 원나라시대 중봉선사(中峰禪師)에 의해 지어졌으며 명칭은 그가 기거했던 암자의 이름이라는 설과 원림내 기암괴석의 생김새가 사자와 같다는 설,불교적 유래로 석가모니 탄생 설화와연계된다는 주장이 엇갈린다.저명한 원대화가 예운 림(倪雲林)이이곳에서 시문을 짓고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며 그가 그린『사자림도(獅子林圖)』는 대만 대북(臺北)의 고궁박물관에 보관돼있다.이곳 역시 대형 산수 형국으로 여러 형태의 기암괴석이 신비하게 산을 이루며 배치돼 있다.
한가운데 호수 위에 떠있는 호심정(湖心亭)을 중심으로 작은 화원들과 누각.건물이 배열돼 있다.
창랑정은 소주시 남쪽에 위치하며 오대(五代)때는 광릉왕(廣陵王)의 화원이자 오군절도사 손승우(孫承右)의 별장이기도 했다.
북송대에는 대시인인 소순흠(蘇舜欽)이 한동안 기거했는데 맹자(孟子)의 글귀「창랑물의 맑음이여(滄浪之水淸兮)…」 에서 이름을따「창랑정」이라 불렀고 자신도 창랑옹(滄浪翁)이라고 호를 칭했다. 이곳은 원래 높은 들녘이어서 주로 산의 형상을 중심으로 들녘의 체취가 강한 산림이 많이 등장한다.인위적으로 옮겨놓은 기암괴석이나 지어놓은 정자들,오백명현사(五百名賢祠)와 명도당(明道堂)을 중심으로 배치된 매화.오동.배나무 등은 어 느 원림보다 심산유곡의 선경(仙境)을 거니는 듯하다.명나라시대 미술계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심주(沈周)가 이곳에 자주 들러 시문을 교유했다는 기록이 있어 회화사와도 인연이 깊다.
망사원은 남송대(1140년 전후)관료인 사정지(史正志)의 집인 만권당(萬卷堂)의 일부분이다.사정지의 관직이 시랑(侍郎)에이르렀으나 퇴임한 후 이곳에 거처하고 원래는 「어은(漁隱)」이라 불렀다.그러나 송종원(宋宗元)에 의해 역시 숨은 어부라는 뜻의 망사원으로 명칭이 바뀌게 된다.
호수가 중심이 돼있으며 백송.나한송.흑송 등이 고루 심어져 있어 오밀조밀한 개인정원의 면모를 잘 나타내고 있다.유명한 화가 장대천.장선자 형제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장선자는 호랑이를 좋아해 직접 기르기도 했다.
「소중견대(小中見大)」와「곡경통유(曲徑通幽)」-.즉 작은 사물을 통해 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심산유곡의 형상을 효과적으로표현하는 것은 원림건축의 가장 중요한 기법이다.그들은 이와같은작은 자연세계의 재현을 통해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무릉도원이나 장생불로(長生不老)의 절대적 경지에서 노닐고 싶어했으며 이상세계 속에서 생활하고자 했다.
한껏 흐드러진 버드나무와 수천마리를 넘을 듯한 비단잉어,쏟아붓는 빗줄기에 고개를 숙이고 대나무음(竹音)의 칸타타를 연주하는 죽림(竹林)….옛 선비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작은자연」들을 거닐면서 이곳이 선비들의 유토피아였으 리란 감흥이 짙게 와닿는다.
▒ 다음회는 「주자청의 문학고향,포구와 진회하」편입니다.
글=최병식교수(경희대미술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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