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칼럼

눈물의 DNA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올림픽이 끝났다. 장하다. 자랑스럽다. 올림픽 동안 여러 번 울었다. 태극기가 올라가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괜히 눈물이 난다. 그 좋은 날, 벅찬 순간, 환호해야 마땅한데 왜 눈물이 나는 것일까. 태극기를 보면 눈물부터 나는 DNA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일본의 압제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이상화의 절망이, ‘그날이 오면 종로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두개골이 깨어져도 기뻐서 죽겠다’는 심훈의 갈망이 유전으로 흐르고 있는가.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를 하던 인조의 수치심이, 조선은 청의 속국이므로 해외사절을 파견하려면 청의 허락을 받으라며 ‘준칙삼단’을 주장하던 위안스카이에게 눌려 지내던 고종의 울분이, DNA로 내 몸속에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보릿고개를 넘기기가 그렇게 어려웠던 우리들 어린 시절의 한이 아직도 풀어지지 않은 걸까. 다음 세대에는 이런 눈물의 DNA를 넘겨주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기쁠 때 울지 않고 환호하는 자연스러움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미 우리 선수들과 이 세대의 아이들은 변하고 있다. 우리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의 이런 자유로움과 당당함을 지켜줄 의무가 있다. 그러자면 나라를 제대로 보전해야 한다.

주변국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문제는 우리가 작은 나라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대로 안 된다는 점이다. 때로는 주변 강대국의 의지가 우리 의지보다 더 결정적이다. 그들이 더 큰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라를 지켜가자면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이웃의 자비에만 맡길 수 없다. 일본의 독도 주장을 보라. 일본 우파의 소행이라고 가볍게 볼 수 없다. 그들은 그 넓은 바다에 수많은 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독도를 고집한다. 태평양전쟁처럼 만일 일본 극우파가 집권할 경우 독도 문제로 전쟁이 나지 않으리라 누가 보장할 수 있나. 이번 올림픽 때 중국 사람들이 한국 선수를 대하는 태도를 보라. 일본보다도 한국을 더 미워한다니 섬뜩하지 않은가.

균형외교란 말은 그럴듯하다. 우리를 둘러싼 중·일·러 사이에서 우리가 균형을 지키며 살아남자는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하던 그 균형자론이 그런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균형자도 힘이 있어야 한다. 유럽 대륙에서 독·불 간 세력경쟁에 영국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영국은 힘이 있었기 때문에 균형자가 된 것이다. 우리도 대한제국 말에 그런 시도가 있었다. 청나라를 거부하기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인다는 거청인아(拒淸引俄) , 일본과 중국의 힘으로 러시아를 막자는 친중결일(親中結日) 등 이리저리 궁리를 해보았다. 그러나 힘이 없는 조선은 그들 모두의 노리갯감이었다. 중·일·러 그들은 오히려 힘없는 조선을 39도선으로 분할해 나눠 가질 도모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큰 나라 사이에 끼어 있는 우리는 ‘우리 힘+알파’가 필요한 것이다.

같은 이웃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국익으로 판단한 서열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순위를 정할 때 몇 가지 원칙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우리나라와 공동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느냐다. 우리 헌법정신처럼 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존중하고 의회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시장주의를 지키느냐는 것이다. 둘째, 역사적 경험을 참조해야 한다. 우리의 자주와 독립을 저해했던 나라들이 누구였는지 실증적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이다. 셋째, 아직도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러시아라는 대국을 옆에 둔 우크라이나가 왜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에 가입하려 하며, 그루지야는 왜 미국과 손을 잡는가. 나보다 수십 배 더 큰 거인이 아무리 친절하고 착하다 해도 바로 옆에 있으면 두렵고 불편한 법이다. 그들이 함부로 주먹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하자면 힘을 가진 친구가 곁에 있어야 한다.

후진타오 주석과 이명박 대통령이 한·중 간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포했다. 한·미 동맹과 한·중 전략적 동반자 관계는 충돌이 없는지 궁금하다. 이 나라가 100년 전 처럼 친중·친미·친러·친일로 찢어져서는 안 된다. 이미 친중·친미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 스스로 안에서 무너지면 속수무책이다. 외부세력에 빌미를 주기 때문이다. 정부부터 실용외교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혼란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문창극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