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씨 5.18사건 5차공판-집권 시나리오 신문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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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22일 열린 「12.12및 5.18사건」 5차 공판에서는 집권 시나리오 존재여부를 비롯한 80년 신군부측의 내란음모에 대한 신문이 집중됐다.
다음은 전두환피고인에 대한 검찰 직접신문 내용.
-80년 2월 보안사에 정보처를 부활시킨 것은 민간정보 수집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나요.
『김재규가 흑심을 품고 정보를 독점하려고 당시 보안사 정보처를 바꾼 것인데 본인이 사령관이 된뒤 朴대통령께 이는 잘못된 것이니 부활할 것을 건의했고 대통령께서 중정부장과 상의해 결정하라고 했습니다.』 -80년 2월중순께 정보처 산하에 언론대책반을 설치했지요.
『기억나지 않습니다.』 -언론대책반 설치로 보안사가 오히려 계엄사의 보도검열업무를 조정,감독하게 됐지요.
『보안사 언론반은 계엄령이 선포되면 군 계엄계획에 따라 자체적으로 만들게 돼있는 겁니다.』 -K공작계획을 알고 있지요.
『5공청산청문회 당시 처음 들었습니다.』 -(K공작계획 사본을 제시하며)보안사령관 시절에 이를 결재한 사실이 있나요.
『결재야 했겠죠.그러나 처장 선에서 한 일이라 일일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K공작계획의 1단계가 80년 3월24일부터 시작됐는데 언제 이 계획을 입안했나요.
『전혀 모릅니다.왜 「K」자를 썼는지도 모릅니다.』 -이 계획 목적은 「단결된 군부의 기반을 주축으로 안정세력을 구축함에있음」이라고 돼 있는데 이는 신군부측의 정권장악 기도에 유리한여론을 조성키 위한 것이 아닌가요.
『대통령이 되려 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언론공작인데 언론반장 자리에 장성이나 교수 등이 아닌 준위에게 맡기겠습니까.』 -당시 회유공작 대상이 7대 중앙일간지와 5대 방송사,2대 통신사의 사장과 주필.논설위원.편집국장 등 총94명이었다는데 사실인가요.
『전혀 기억나지 않고 보고받은 사실도 없습니다.』 -80년 4월 피고인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직하게 된 경위는 어떤가요.
『최규하대통령이 김재규의 朴대통령 시해사건 이후 중정 기능을정상화시키기 위해 본인에게 중정부장을 맡아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피고인이 중정부장을 겸직함으로써 군과 민간의 정보를 독점하게 된 것이지요.
『아닙니다.합수본부장으로서 경찰과 군의 정보를 이미 얻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 피고인의 중정부장 겸직이야말로 집권을향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사실 아닙니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아까부터 마치 집권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는데 그런 집권계획서가 있다면 보여주면서신문하세요.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있는 것처럼 말하면 어떻게 답변할 수 있겠습니까.』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군이 전면에 나서 정국을 장악하려는 생각을 한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다.16년전의 일을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이해되지 않을 부분도 있겠지만 당시엔 나라가 치안부재의 상태로 빠져들었습니다.어떤 대책이 없었다면 김일성이 쳐 내려왔을 것입니다.』 -80년 5월 김영선 당시 중정2차장이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남침위협에 관한 첩보가 입수됐다고 하면서 피고인에게 보고한 사실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5월11일 육본 정보참모부에서 첩보 분석결과 「북괴 군사동향은 특이한 전쟁징후는 없고 5월남침설은 우리의 국내정세 추이에 따른 북괴 남침방책의 일반적 가능성을 추측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부정적 결론을 내린 사실을 알고 있나요. 『그 분석은 국방부와 중정이 함께 내린 것입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북한 남침유형은 크게 두가지로,첫째 북한이 전면남침해오는 경우로 군과 모든 국민이 침략군을 격퇴시켜야 하고,둘째로세계적으로 유명한 북한 특수8군단 10만여명의 정 예부대가 후방에 침투해 데모 등을 통해 교란행위를 전개함으로써 결정적인 시기를 조성한 뒤 무정부상태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것입니다.』 -80년 5월초 보안사 참모들이 2~3일간 수시로 만나 본격적으로 그 방안을 논의하였다는데 알고 있나요.
『모르고 있었습니다.만약 권정달이 그랬다면 명령위반입니다.』-시국수습방안의 내용은▶계엄지역 전국확대▶비상기구 설치▶국회 해산이지요.
『계엄이 불완전한 것이어서 계엄답게 하자는 것이었고 정치권에서 학생 등을 동원하는 등 혼란을 야기해 당분간 정치활동을 중단하자는 뜻이었습니다.또 당시 국기문란자나 권력형 부정축재자들을 다스려야 한다는 생각이었으며 계엄사령관 혼자 대통령을 보필하기가 어렵다고 판단,비상기구인 국보위를 설치하자는 의도였고 대통령을 통해 당시 시끄러웠던 국회를 잠시 해산시키려 했던 것뿐입니다.』 -5월4일 노태우.유학성.황영시.최세창피고인 등이모인 자리에서 시국수습방안을 설명한 적이 있지요.
『거짓말입니다.내가 권정달에게 5월10일 지시했는데 어떻게 4일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시국수습방안중 이학봉에게 부정축재자.학원소요 배후조종자를 조사케 하고 나머지는 권정달에게 입안,실행토록 했나요.
『부정축재자 조사는 학생들의 건전한 주장을 수렴하기 위해 지시했으나 전반적인 사항은 권정달이 총괄해 보고,실행했습니다.』-이학봉피고인이 권정달 정보처장으로부터 관련자료를 받아 검거대상을 학생시위 배후조종자에 대해서는 국기문란자로,부정부패 행위자에 대해서는 권력형 부정축재자로 분류해 5월13일 피고인에게보고했지요.
『사실입니다.』 -5월15일께 이학봉피고인이 정리한 「국기문란자 수사계획」과 「권력형 부정축재자 수사계획」등을 최종보고받았지요. 『맞습니다.』 -피고인은 임시국회 소집일 이전인 5월17일 시국수습방안을 전격 실행하기로 했지요.
『오해하면 안됩니다.국민연합이 7개항의 요구가 19일까지 수용되지 않을 경우 22일 민중봉기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따라서정학(政學)연대가 이뤄져 시위양상이 정부타도로 탈바꿈했습니다.
당시는 치안이 공백기였고 노동자.학생.국민연합. 청년이 연대해시위하면 정부타도는 쉽습니다.결국 북한 남침이 자연스레 이뤄져청와대는 자연적으로 김일성이 접수하게 됩니다.대통령 귀국에 맞춰 이를 보고한뒤 결단을 내려 시행했습니다.』 -80년 5월17일 오전 11시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요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가운데 전군 지휘관회의가 열렸지요.
『예.』 -80년5월16일 최규하대통령 귀국직후 신현확국무총리등이 참석한 긴급 심야회의에 참석,전군 주요지휘관회의 개최사실을 보고했습니까.
『국방장관이 할 일이지 본인이 한 적은 없습니다.』 -노태우피고인이 5월17일 오전8시쯤 이현우 30경비단장등에게 국무회의가 열리는 중앙청을 철저히 경비하라고 지시했는데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주영복장관에게 시국수습방안을 대통령에게 설명토록 한 것은 그 자체가 군의 정치개입 아닙니까.
『시국수습방안을 주영복장관에게 설명했을 뿐 대통령에게 건의해달라거나 지휘관회의에서 논의해 달라고 한적이 없습니다.』 -시국수습방안과 관련해 유병현 합참의장이 국회해산과 비상기구 설치등은 정치적인 사안이므로 군에서 나설 필요가 있겠느냐며 반대입장을 표명했지요.
『잘 모릅니다.』 -최규하대통령이 당시 비상계엄확대 조치를 제외하고 다른 방안은 군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다시 되풀이돼선 안될 일이라며 거부하는 태도를 보였다는데요.
『사실과 다릅니다.국회해산에 대해서만 반대해 재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소요 배후조종자및 부정축재자 조사계획을 수립,착수토록 지시했지요.
『이학봉 수사단장에게 실무를 일임했습니다.』 -김대중 국민연합의장등 정치인과 재야인사.학생등 2천6백여명을 강제연행,구금했지요. 『실무적인 일이라 구체적으론 잘 모릅니다.』 김상우.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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