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이혼 전 상담 의무화' 추진한다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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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주부 金모(60)씨는 1년 전 북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온 뒤의 악몽을 요즘도 잊지 못한다. 딱 열흘 동안 집을 비운 사이 며느리와 갈라선 아들이 두돌 된 손자와 함께 짐을 싸들고 집으로 와 있었던 것.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金씨에게 아들은 "이혼은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이라면서도 손자를 키워줄 것을 부탁했다.

결혼 초부터 18년간 남편의 외도와 구타에 시달리던 주부 손모(45)씨는 "웬만하면 참고 살아라"는 시집 식구들의 말을 이젠 귓전으로 흘려듣는다. 두달 전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는 손씨는 "지난 5년간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이거나 고통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혼 전에 부모하고라도 의논해 보지"라며 안타까워하는 金씨와 "이제는 더 이상 고민하고 싶지 않다"는 손씨. 이들은 최근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이혼 전 상담 의무화' 방안(본지 3월 27일자 참조)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김화중 보건복지부 장관은 지난달 26일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한 업무보고에서 "앞으로 이혼을 원하는 부부는 전문기관의 상담을 받은 뒤 이혼이 불가피하다는 인증서를 받아야 이혼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혼 절차를 까다롭게 해 갈수록 늘어나는 이혼을 막아보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여성.상담.가정운동 단체들의 반발과 비판이 거세다. 일부 단체는 상담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복지부의 '의무화' 방안이 문제가 많다는 지적이다.

한국여성민우회 가족과 성상담소(이하 가족과 성상담소)는 지난 16일 보건복지부에 비판적 견해를 담은 의견서를 제출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5월 10일 이혼 전 상담제도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준비 중이며 한국여성개발원도 다음달 이혼 인증제를 포함한 건전가정기본법의 문제점을 정기 포럼의 주제로 잡았다.

가장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가족과 성상담소는 의견서를 통해 "이혼 전 상담 제도는 '의무화'이자 '이혼 허가제'"라며 "국가가 개인의 이혼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단체의 유경희 소장은 "수년간 상담해 본 경험에 의하면 이혼 결정은 오랜 기간 숙고한 결과"라며 "배우자의 폭력 등으로 고통받을 경우 이혼 인증제가 이혼을 늦춤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주게 된다"고 주장했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곽배희 소장도 "국가가 이혼을 줄이기 위해 이 제도를 시행하겠다는 발상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해 우리나라 이혼의 85.9%는 5~10분 안에 끝나는 협의이혼으로 이혼에 대한 충분한 준비가 없는 경우가 많다. 郭소장은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자녀 양육과 재산.위자료 등을 충분히 협의하고 이혼에 대해 정확히 알고 미래를 대비하게 하기 위해 상담을 '강추'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정을 건강하게 하는 시민의 모임' 김숙희(전 교육부 장관)회장은 "우리나라의 이혼 과정은 감정적 상처 때문에 결혼 생활, 이혼 과정, 이혼 후 생활 등을 현실적인 시각에서 살펴볼 시간도 없이 극단적으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며 "이혼 전 상담을 의무화해서는 안 되지만 상담받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이혼 과정상의 문제를 도와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말했다.

누가 상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도 주요 논란거리 중 하나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1월부터 발효되는 건강가정기본법을 근거로 내년에 전국 세 곳에 만들어지는 건강가정지원센터에서 건강가정사에게 상담을 맡길 예정이다. 건강가정사는 대학에서 사회복지학.가정학.여성학 등을 전공한 자면 자격이 주어진다.

유소장은 "아직은 가부장적 문화가 팽배해 있는 상태라 '웬만하면 참아라'며 여성의 인내를 요구하기 십상"이라고 우려를 표명했다.

郭소장도 "복지부가 오랜 상담경험과 전문 상담인력을 갖춘 민.관 기관과 충분한 협의를 거쳐 신중하게 제도를 마련해야 실효성 있는 정책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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