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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속의 야구 결승전, 한·일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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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호 24면

한대화 삼성 수석코치는 지금도 국내리그 경기가 끝나면 식사를 하러 대구 인근 단골 횟집에 들른다. 여기서 손님 몇몇에게 26년 전 이야기를 듣는다. 얼큰하게 취한 40, 50대들이 대개 말을 붙여 온다. 변함없는 레퍼토리다. “그때 스리런 홈런 정말 대단했지요.” 1982년 9월 14일 서울 잠실구장.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일전에서 나온 한대화의 스리런 홈런. 대한민국 스포츠의 80년대는 한대화의 스리런포, 김재박(LG 감독)의 환상적인 ‘개구리 번트’로 시작해 88년 서울올림픽으로 마무리됐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게다.

한 코치 역시 그 말이 나오면 빼놓지 않고 대응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김재박의 번트(8회 동점 스퀴즈 번트)는 사인 미스에서 이뤄진 작전이었다는 것. 또 하나는 “우리는 그 게임을 결코 질 수 없었다. 아니, 져선 안 되는 경기였다.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대는데 선수단 분위기도 내내 전쟁을 치르는 느낌이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의 집요한 억지도 수십 년이 넘어선 것이었고 그때나 지금이나 한·일 야구는 야구를, 스포츠를 넘어선 싸움이었다. ‘제기차기를 해도 한·일전이라면 관중이 모인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일 라이벌 코드는 어떤 이벤트가 있을까. 한국 배구는 이미 예선 탈락했다. 축구는 2주 전 올스타 친선경기(조모 컵)에서 K리그가 3-1로 크게 승리하면서 불씨를 달궜으나 한국과 일본이 본선 조별 리그에서 다른 조에 속해 맞대결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야구가 유일하다는 얘기다.

한국과 일본은 16일 오후 8시 베이징 우커쑹 구장에서 맞붙는다. 이번 대회는 8개국이 풀 라운드를 펼친 뒤 1-4위, 2-3위가 준결승전을 한다. 7경기 중 네 번째로 치러지는 16일의 한·일전은 양 팀 모두에 중요하다. 김경문 대표팀 감독은 “한·일전보다 앞선 3경기(미국-중국-캐나다)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막상 한·일전이 시작되면 다르다. 물론 앞선 3경기에서 2패 이상 당하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 경기는 ‘결승전’이다.

분위기는 일찌감치 달아올랐다. 여러 정황이 한·일 대결을 클라이맥스에서 치르도록 군불을 때는 격이다. 한국의 ‘국민 타자’ 이승엽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요미우리 4번 타자’였다(이승엽은 전반기 내내 2군에 머물러 있었다). 요미우리 4번은 일본의 4번이다. 중압감도 대단하지만 프라이드 넘치는 ‘지위’다. 요미우리 4번이 기나긴 재활을 마치고 덜컥 베이징 올림픽을 위해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대표팀 유니폼을 입겠다고 선언했다.

일본 언론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는데 대체적인 뉘앙스는 ‘온전하게 재활 시간을 충분히 줬으니 이승엽에게 덜미를 잡힐 수 있다’는 시각이다. 더 나아가 산케이스포츠 같은 극우 계열의 언론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독도 문제까지 ‘친절하게’ 언급하는 호들갑도 잊지 않았다.

2000년대 이전까지 한·일 수퍼게임 같은 경기가 열리면 한국 프로야구는 분명한 실력 차를 느끼고 돌아오곤 했다. 한국 프로야구 베스트 멤버가 나가는 대회에서 일본의 프로-사회인야구 연합팀과 대등한 게임을 펼치는 정도였다. 그러나 2006년부터 달라졌다.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한국과 일본의 최정예 멤버들이 붙었을 때 한국은 두 번이나 승리했다.

2006년 3월 16일. WBC 결선 라운드가 열린 미국 애너하임 에인절스타디움에서 2-1로 승리한 뒤 서재응(당시 탬파베이)이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ESPN 중계화면엔 일본의 스즈키 이치로(시애틀)가 분을 참지 못하고 ‘F’자로 시작하는 욕설을 내뱉는 장면이 나왔다. “30년 동안 일본야구를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던 그의 장담은 ‘이치로의 굴욕’으로 팬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지난해 가을 베이징 올림픽 1차 예선. 김경문 한국 감독은 국제대회에서 다소 보기 힘든 ‘결례’를 저질렀다. 감독자 회의에서 누차 확인된 사항이었지만 경기 시작 1시간 전에 제출한 선발 오더에서 무려 6명이나 바꿔 게임을 치른 것. 이른바 ‘위장 오더’사건이다. 호시노 센이치 일본 감독은 이를 놓고 대회 내내 분통을 터뜨리며 한국을 압박했다. 승부는 4-5, 한 점 차로 한국이 패하고 말았는데 일각에선 호시노 감독의 ‘가슴 쓸어 내리기’ 혹은, 몰라보게 성장한 한국 야구에 대한 히스테리라고 보는 시각이 있다.

WBC에서 한국을 4강으로 이끈 김인식 한화 감독은 “5게임 이상 하면 승률은 점점 떨어진다. 한국이 불리하다. 하지만 한두 경기라면 한국에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또 “최근 국제대회에서 일본과 매번 팽팽한 승부를 했다. 한국이 일본과의 격차를 줄였다는 증거다. 또한 이 과정에서 충분히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승률 2위 팀과 승률 4위 팀이 3연전을 하면 2위 팀이 2경기에서 승리하거나, 아니면 그 반대다. 3연승, 3연패는 어렵다. 김 감독의 말은 결국 국내리그 승률 중위권 팀 간의 맞대결 수준으로 한·일전이 전개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대표적인 ‘지일파’ 김성근 SK 감독의 말은 어떨까. 지난해 11월 코나미컵 예선에서 일본 프로야구 챔피언 주니치를 꺾어 일본 야구를 뒤흔들어 놓았던 김성근 감독은 “전력상 큰 차이가 없다. 선발 투수가 잘 버텨 주면 막판까지 재미있는 승부가 펼쳐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만 김 감독은 “일본은 특급 마무리들이 연속해 등판한다. 막판 3~4이닝 동안 점수를 뽑기 어렵다. 우에하라 고지(요미우리), 이와세 히도키(주니치), 후지카와 규지(한신)가 등판하기 전에 리드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초반 리드를 잡아야 승산이 있다는 얘기다.

일본 대표팀은 ‘금메달 도전’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준비해 왔다. 금메달 이외의 것은 ‘재팬 베이스볼’에 수치다. 일본은 일찌감치 1년 전부터 모든 준비를 호시노 체제 하에 진행해 왔다. 캐치프레이즈도 ‘호시노 재팬’이다. 호시노의 야구, 일본의 야구를 세계에 과시한다는 의지를 담은 말이다. 반면 한국의 김경문 감독은 국내리그에 매달리다 대회 직전 대표팀에 합류했다.

이번 한·일전에선 메이저리거 없이 양국 리그의 베스트 멤버가 격돌한다. 한국산 왼손 영건 듀오 류현진(한화)·김광현(SK)과 일본의 미남 투수 다루빗슈 유(니혼햄)가 총출동한다. 일본 마무리투수 후지카와가 뿌리는 150㎞ 직구와 한국의 ‘언터처블’ 오승환(삼성)의 마지막 회 대결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무엇보다 이승엽의 대표팀 합류는 그 자체로 드라마다. 기나긴 2군 생활의 시련을 이기고 한·일전에서 멋진 활약으로 해피엔딩을 연출할지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그래서 더욱 기다려지는 드라마다.

십수년 뒤 이승엽이 국내 프로팀의 코치 또는 감독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해주길 기대하자. “요즘도 식당에 가면 2008년 베이징 올림픽 한·일전 홈런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휴! 그게 언제 적 이야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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